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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맛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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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Sep 07. 2021

네 덕에 내가 잘 먹었다, 잔치국수

'간단'한 '잔치'국수의 역설

아침부터 비가 올 것처럼 흐릿하더니 정오가 가까워도 좀체 집 안으로 빛이 들지 않는다.

이번 달도 재택근무 확정, 업무 상매경인 남편의 방문을 두드렸다.

"점심에 간단하게 잔치국수 어때?"

"아 좋지."


다시물부터 올려놓은 뒤, 계란물을 풀어 지단을 부친다. 지단을 한 김 식혀두고 노랗게 깊어져가는 육수 옆에서 당근과 애호박을 채썬다. 계란이며, 당근이며, 애호박이며 모두 고명으로 올라갈 것들이다. 들기름에 조물조물 무친 김치만 올려도 맛있겠지만 오늘은 담담하고 깔끔한 국물이 당긴다. 맑고 깊은 국물을 대접째 한 모금, 상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곧 다가와 현실이 될 '아는 맛'은 미뢰를 자극하고 마침내 대뇌까지 건드려 고향집의 잔치국수를 떠올리게 한다.




스스로 열심히 산다고 자부하던 20대 초반, 원인불명의 병을 얻어 패잔병처럼 고향으로 내려갔다. 산골집의 시계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갔다. 정신없이 달렸던 시간들이 꿈 같았고, 여기에 멈춰 있는 나에게 짜증이 났다. 그 짜증은 고스란히 가족에게로 향했다.


고향집에서 머무는 1년 동안, 엄마와 나는 무수히 많은 점심들을 함께했다. 밑도 끝도 없는 나의 지랄에 "문디가스나"라고 혀를 내두르다가도, 끼니 때가 되면 엄마는 문디를 먹이기 위해 밥을 지었다. 문디의 식욕도, 엄마의 의욕도 저조한 날엔 잔치국수를 끓였다. 진한 육수내음이 집 안 가득 퍼지면 식욕을 되찾은 문디가 부엌을 기웃거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잔치국수 두 그릇이 놓였다.


"우와, 진짜 맛있다. 왜 이렇게 맛있어? 뭐 넣으면 이렇게 맛있어?"

호들갑스러운 감탄사를 연발하며 면과 국물을 들이키는 나를 보다가 엄마는 기가 막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바닥을 구르며 떼를 쓰다가도 막대사탕 하나 쥐어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방실거리는 어린 아이를 볼 때처럼.

"그기 그렇게 맛있나."


국수 그릇이 바닥을 보일 때쯤 엄마는 으레 면과 국물, 고명을 얹어 다시 새로운 국수 한 그릇을 만들어주었고, 나는 배부르다고 내젓던 손으로 못 이기는 척 그릇을 받아들었다. 마지막엔 한껏 부른 배를 안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씩씩거리다가, 다 먹은 국수그릇을 포개면서 엄마는 꼭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네 덕에 내가 잘 먹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밥상에서, 내 덕에 잘 먹었다는 엄마의 말에 진심이 담뿍 담겨 있는 것이 늘 의아했다. 도대체 뭐가 내 덕이라는 걸까.




점심상이 못내 허전하다. 뭐 더 내놓을 게 없나, 자꾸만 냉장고를 기웃거린다. 나 혼자였다면 거르거나 대충 때웠을 점심이지만 남편과 함께 먹는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인다. 대단히 남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람 마음이 그렇잖은가. 내가 나를 좀 홀대할지언정 남에게는 차마 소홀하게 대할 수 없는 것이다.


"점심 먹자!" 있는 것들로 조차조차* 상을 차려놓고 남편을 부른다.

"어어 맛있는 냄새 난다야."

국수를 담아놓고 부르면 면이 불까봐 조금 일찍 불렀는데, 바로 나와서 앉는 남편이 고맙고 기특하다. 채반에 밭쳐둔 국수를 그릇에 담고, 끓고 있는 육수로 토렴한 뒤, 고명을 올려 낸다.


"음~ 야, 국물이 제대론데!"

호들갑스러운 감탄사와 함께 요란스럽게 들이키는 모습이 밉지 않다. 아니, 마냥 예쁘기만 하다.

아...비로소 나는 엄마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는다.


'받아먹는 자'의 최대임무는 '부를 때 빨리 와서 제깍 먹는 것'이다. 그저 제때 나와 잘 먹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와 마주앉아 점심을 먹던 그때의 나는 꽤나 성실한 취식자였다. 그러니 엄마도 내가 예뻤을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결혼을 했고 꼬박꼬박 내 손으로 밥을 짓는 사람이 됐다.


밥을 짓는 일은 그다지 즐겁지 않다. 엄마 또한 매 끼니 반복되는 식사준비가 늘 달가웠을 리 없다.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밥을 짓는 사람이 되고 나서야 알다니. 그저 도리와 의무를 다하고자, 내키지 않을 때에도 손을 움직여 겨우 먹을만한 것을 내놓는 날이 다반사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음식을, 보잘 것도 먹잘 것도 없는 음식을, 온갖 감탄사를 연발하며 먹는 남편의 모습에서 엄마의 딸이기만 했던 시절, 나의 모습이 보인다.


잔치란 간단한 게 아닌데, 잔칫날에나 맛볼 수 있었던 국수는 왜 간단한 음식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간단하게 잔치국수"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 말인가.

"네 덕에 내가 잘 먹었다" 정작 수고는 자신이 해놓고 '받아먹는 자'에게 밥상의 공을 돌리는 엄마의 말처럼.


어느 새 국수는 바닥을 보이고, 시계 바늘은 작은아이의 하교 시간을 향해 치닫고 있다. 혼자였으면 고픈 배를 안고 하굣길에 나섰을 게 틀림없다.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진심으로 남편의 공로를 치하했다.

"아, 배부르다. 당신 덕에 내가 잘 먹었네."


내 손으로 지어 먹고도 네 공으로 돌리게 되는, 간단한 잔치국수의 역설.




*조차조차 :  어찌어찌 대충대충, 되는대로 조금씩 조금씩, 의 뜻으로 두루 쓰이는 시어머니 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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