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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맛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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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Dec 11. 2020

막내들의 연결고리, 숙주나물

막내를 왜 그렇게 놀려대느냐고요들

눈이 번쩍 뜨였다.

'잘 잤다!'

머리가 맑았다.

한참 자고 일어났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개운함이었다.

아직 사위가 어둑어둑했고 시계는 막 일곱시를 지나고 있었다.


서둘러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나가니 가족들은 벌써 아침을 먹고 있었다.

"왜 체육복을 입고 나오냐?"

오빠가 물었다.

"오늘 체육이니까."

"...오늘 체육이라고?"

오빠가 밥을 먹다 말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뭐 왜, 체육이 뭐.


아침식탁에서의 아빠가 낯설었다. 매일 새벽같이 출근하는 아빠가 오늘은 웬일로 집에서 아침을 드시나.

"아빠, 오늘 회사 안 가?"

"엉?"

"오늘은 왜 집에서 밥먹어?"

"그냥...천천히 갈라고."

순간 아빠입가가 씰룩이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잘못 봤나?


밥을 다 먹고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내가 준비를 마칠 때까지 오빠는 옷도 안 갈아입고 빈둥거렸다. 하여튼 천하태평. 그러거나 말거나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려는데 오빠가 나를 불러세웠다.

"야, 기다려. 같이 나가자."

"가방도 안 메고?"

"나 오늘 가방 없는 날이야."

뭔소리야. 90년대 국딩이 그런 날이 어딨어. 의심의 눈초리로 오빠를 보고 있는데 엄마아빠까지 신발을 신고 우리를 따라나섰다.


"야야 동네 한 바퀴 돌고 가자."

"나 지금 학교가야 되는데?"

"좀 천천히 가도 돼. 학교에 말해놨어. 오늘 산책하고 간다고."

학교 가기 전에 산책을 간다고? 그걸 학교에 전화해서 말을 했다고? 그게 합당한 지각사유가 된다고?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표에 홀린 듯 떠밀려 현관을 나섰다.


바깥은 한층 더 어두워져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어두워?"

"아 오늘 비온대."

오빠의 재빠른 대답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정도로 어두우면 곧 쏟아지겠는데. 이미 오고 있는 거 아니야?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니 응? 달이 떠 있었다. 희끄무레하게 보일 듯 말 듯한 낮달이 아닌, 밤하늘에서나 볼 법한 누런 손톱달이었다. 아침댓바람부터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아빠가 집에서 아침을 드시질 않나, 오빠는 가방도 없이 학교엘 가고, 등교 전에 온 가족이 산책을 하고 있다. 아무리 비가 올거라지만 갈수록 어두워지는 하늘에, 이젠 또 달이라니?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 옆에서 웃음을 참느라 거의 울기 직전인 가족들의 얼굴을 제대로 봤었더라면. 그러나 옆 사람 얼굴근육의 미세한 떨림까지 감지하기엔 바깥은 이미 한껏 어두워진 뒤였다.


그러니까 내가 눈을 뜬 시각은 아침 일곱시가 아니라 저녁 일곱시였다. 낮잠을 자다가 저녁 일곱시에 일어나 체육복을 입고, 저녁상을 아침상처럼 받고, 책가방을 챙겨 학교로 향하는, 나만 홀로 이상한 놈이었다. 비몽사몽 헤매는 나를 두고 가족들은 이심전심 눈짓으로 공모를 마쳤던 것이다.


"아침에 왜 달이 떴어?"

밤하늘의 달을 보고서도 나멍청이는 여전히 사태파악을 못하고 얼뜬 질문을 던져댔다.

"아 원래 이렇게 비 오기 전에 잠깐 달이 보이는 그런 날이 있어."

먹잇감을 문 하이에나처럼 오빠는 절대 이 재미난 건수를 놓칠 생각이 없었고, 엄마아빠는 배부른 사자처럼 뒤에서 느긋하게 관망함으로써 오빠의 장난질에 일조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짙어지는 하늘과 그에 대비되어 점점 밝아지는 달빛이 이상했지만 그래도 학교로 향하겠다며 책가방 끈을 쥐고 기어이 대로로 발걸음을 옮기는 내게 엄마가 소리쳤다.

"우산 가지고 가야지! 집에 갔다가 가!"

...엄마 또한 내게 진실을 알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게다.


집으로 돌아와 우산을 챙겨 나가려는데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그제서야)인지부조화가 찾아왔다. 이제 바깥은 칠흙같이 어두웠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학교를 향해 걷는 일이 무척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집안을 둘러보았다. TV에서 일일연속극이 방영중이었다. 어? 저건 밤에만 하는건데? 가족들의 표정을 돌아가며 살폈다. 오빠, 아빠, 엄마, 모두 코와 입에 힘을 잔뜩 주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어어? 어어어? 그제야 나는 마침내 내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아침(?) 내내 느낀 소외감을 꾹꾹 눌러담아 힘껏 울음을 터뜨렸다.


"아침이라매! 밤이라고 왜 아무도 말 안 해주는데! 우와앙!!!"

"아니, 왜 우냐. 어허허허"

"우리가 언제 아침이랬냐. 클클"

"아이 그러게 말이여. 켈켈"


집안의 막내란 이런 것이다. 처음엔 별 생각없이 놀리다가도 돌아오는 반응이 우스워 사력을 다해 놀리고 싶어지는 존재. 결국엔 온 가족의 표적이 되어버리고 마는 존재.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혼자 상처받는 존재. 모두가 상처를 주면서 아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존재.




이런 가족들의 진지한 장난질에 나는 매번 진심으로 상처받았고 종래에는 엄마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됐다. 아빠와 오빠에게는 애초에 기대치가 없었지만 엄마만큼은 그 고약한 장난에 동참하지 않고 내 편에 서주길 바랐다. 그러나 반복되는 엄마의 배신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고 그럴수록 나는 자꾸만 엄마를 들볶았다.


"엄마, 나를 더 사랑해? 오빠를 더 사랑해?"

"오빠."

굴하지 않고 희망의 크기를 줄여 다시 도전해본다.

"엄마, 그럼 나를 더 사랑해? 단비를 더 사랑해?"

그때 우리 곁을 유유히 지나가는 우리집 반려견 단비. 설마 딸보다 개를 사랑한다고 대답하진 않겠지.

"단비. 개는 니처럼 말을 많이 안 해서 좋아. 내새끼 이리와 오쪼쪼."

이쯤되면 가슴이 휑해지고 눈물이 핑 돌아 힘없이 방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집에 내 편은 아무도 없어. 난 혼자야. 예전에 고모도 그랬잖아. 너네엄마가 너네오빠 낳는 건 봤는데 너 낳는 건 못 봤다고. 택이는 이 집 아들이 확실한데 네가 이 집 딸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겠다고. 지나온 기억들까지 서럽게 끌어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물을 펑펑 쏟는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든다.


뜨거운 눈물을 모두 쏟아내고 잠에서 깬 나는 다시 태어나기로 한다. 이 시간부로 내 마음은 얼음장같이 차가워질 것이다. 누구에게도 마음주지 않겠다. 오빠 아빠는 물론이고 엄마에게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가족들 따위 내가 버리고 말테다. 다시 태어난 아이스날필은 표정을 굳히고 방 밖으로 나간다.


마침 장을 보고 들어온 엄마가 나를 보고 반색을 한다.

"딸! 우리 딸이 좋아하는 숙주 사왔다!"

마주 웃어주면 안되는데. 나는 다시 태어났는데. 아이스날필인데. 자꾸만 콧구멍이 벌렁거린다. 숙주가 좋은건지, 전에 없이 다정한 엄마의 "우리 딸"소리가 좋은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아무렴 어떠랴. 어쨌거나 엄마는 나를 생각하면서 숙주를 샀을 것이고 오늘 저녁상엔 내가 좋아하는 숙주나물이 오를 것이다. 화려하게 눈길을 끄는 부식거리가 아닌고로 숙주는 일부러 찾아야만 살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식구들은 좋아하지도 않는 숙주를 사왔다는 건 엄마가 오직 나를 위해 마트를 뒤졌다는 뜻이 아닌가. 주체할 수 없는 입꼬리를 제어하기를 포기하고 나는 그만 활짝 웃어버리고 만다. 이토록 속없는 둘째. 애잔한 막내.


그런데 나는 언제부터 숙주를 좋아했나? 처음 먹어본 숙주나물이 맛있다고 한번 말했을 뿐인데 엄마는 그 후로 숙주를 무칠 때마다 나를 들먹였다. 담백하다 못해 밋밋한 숙주나물 말고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차고 넘쳤지만 엄마는 유독 숙주와 나를 짝지었다. 엄마의 난데없는 관계설정에도 별다른 반발 없이 별맛없는 숙주를 좋아하기로 했던 건 나를 위해 무언가를 사왔다는 엄마의 말이 별나게 달콤했기 때문이다.


고소한 맛과 아삭아삭한 식감. 차마 가족을 씹으며 고소해할 수는 없어서 숙주의 고소함으로 분함을 씹어삼켰다. 숙주나물을 씹으면서 다짐했다. 난 나중에 아이를 낳아도 절대절대 막내를 놀리지 않을거야.


그래놓고선.




"정아. 너 소문났더라?"

"뭐라고?"
"정이 못생겼다고 저기 동네사거리에 소문이 다 났던데?"

"엄마 나빠!"


오늘날 나는 왜 이리도 앞장서서 우리집 막내를 놀려대는 것인가. 순간순간 둘째에게 나를 투영하면서도 불쑥불쑥 올라오는 충동을 좀처럼 참기 어렵다. 입매를 뒤집어진 U자 모양으로 만들며 대번에 아랫입술을 삐죽 내미는 둘째의 얼굴이 너무너무 귀여운 탓이다.


"아니야 사실은, 예쁘다고 소문났어."
"히히, 좋은 소문!"

"근데 정이가 예쁘긴 예쁜데,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건 아니지 않아?"

"아니야아, 나 세상에서 제일 예뻐!"

"에이. 세상에서 제일까진 아니고 그냥 쪼끔 예쁘지."

"힝! 엄마 나빠!"


짜릿해. 늘 새로워. 삐친 얼굴이 최고야. 그러다가도 "아니야, 거짓말이야. 우리 정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끌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추면 나를 올려다보며 헤벌쭉 웃고 마는 속없는 둘째. 애잔한 막내.


나의 막내도 숙주나물을 좋아한다. 나 또한 숙주나물을 상에 올릴 때마다 막내를 향해 눈을 찡긋거린다. 엄마의 윙크에 화답하듯 포크 한가득 숙주나물을 뜨며 뿌듯하게 나를 바라보는 막내. 그가 좋아하는 건 숙주나물일까, 사실은 엄마가 나를 좋아한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일까. 그도 나와 같을 것이다. 그는 나의 막내니까.


막내에서 막내로 이어지는 너와 나의 연결고리, 숙주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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