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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맛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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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Nov 13. 2020

왜 (먼저)태어났니, 오빠놈 미역국

둘째로 태어난 자는 모르는 첫째의 비애

"엄마, 새우 미역국 없어?"

앞에 놓인 소고기 미역국을 뻔히 보면서 느자구없는* 소리를 씨부리는 오빠에게 엄마는 고마 있는 국이나 처묵으라며 퉁을 줘놓고선 못내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다. 사흘 안에 새우 미역국이 상에 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츤데레식 엄마의 애정표현에 오빠는 매번 이렇게 화답한다.

"엄마, 엊그제 소고기 미역국은 다 먹었어?"

"에라이, 구척스러운* 놈아."

이렇듯, 기어이 엄마의 걸쭉한 욕설로 끝나곤 하던 것이 우리집의 대표적인 <미역국> 레파토리다.




다 큰 남매가 으레 그러하듯 오빠와 나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다. 현재 오빠가 Y시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남편을 통해 전해들었다. 나도 나지만 오빠도 오빠다. 꼭 지같은 인간을 남매로 둔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잘 통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서로가 하나도 애틋하지 않다.


오빠에게서는 그다지 받은 게 없다. 기억나는 거라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 뜬금없이 "글 쓰려면 노트북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본인의 장학금으로 사 준 넷북 하나. …받은 게 없다고 써야 하는데 하필 기억나는 하나가 너무 고가의 전자제품이라 머쓱하지만. 어쨌든 개수로는 받은 게 별로 없다.


딱히 나를 귀찮아하지도, 그렇다고 살뜰히 챙기지도 않았던 오빠. 누구를 챙기는 건 고사하고 제 몸 하나 챙기기도 버거운 이가 내 오빠였다. 우산이며 겉옷이며 돈이며 골고루 잘 잃어버리고 다니는 오빠가 영 못 미더웠던 엄마는 항상 내게 오빠몫의 차비까지 쥐어주며 당부했다.

"느그 오빠는 덜렁거려싸니까 니가 잘 오마쥐고 있다가 오빠몫까지 내고 타라잉."

손에 쥔 돈은 절대 놓치지 않지만 만원버스 속 손잡이는 사수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나는 버스 안에서 늘 이리저리 떠밀리곤 했다. 그런 순간에도 오빠가 나를 잡아준다든가, 내릴 때 손을 잡고 내린다든가 하는 다정함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까 물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오빠는 나에게 그닥 안온함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아이를 둘 낳아 기르기 전까지는.


오빠는 호기심이 많았다. 우리 동네 붕어빵 아주머니는 멀리서부터 오빠가 보이면 내놓은 계란이며 집기들을 허겁지겁 안으로 들이기 바빴다. 오빠가 눈에 보이는대로 질문을 쏟아내는, 이른바 <물음표 살인마>였기 때문이다.

"아줌마, 이 계란은 삶은 계란이에요? 날계란이에요?"

"오뎅국물로 삶았어요? 집에서 삶아왔어요?"

"이거 아줌마 간식이에요? 아님 돈 받고 파는 거예요?"

노점 삶은 계란 하나로도 순식간에 세 개의 질문을 쏟아내는 어린이를 상대하기에 아줌마는 뒤집어야 할 붕어들이 너무 많았다. 하루는 참다못한 붕어빵아줌마의 하소연을 한바가지 듣고 온 엄마가 오빠에게 "바쁜 사람한테 질문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우리 중 아무도 오빠가 엄마의 당부대로 행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오빠는 넉살이 좋았다. 평상시엔 집에 돌아오자마자 간식을 찾아 부엌을 기웃거리는 오빠가 그날은 방으로 쑥 들어갔다. 이상하게 생각한 엄마가 "배 안 고프냐"고 물었더니 빵을 먹어서 배가 안 고프다는 답이 돌아왔다. 용돈을 받는 즉시 탕진하고 동생의 용돈을 호시탐탐 노리는 오빠가 돈이 어디 있어서 빵을 사먹는단 말인가.

"빵이 어디서 났어?"

"아저씨들이 줬어."

"무슨 아저씨들이?"

"공사하는 아저씨들"

공사장 인부들이 새참으로 먹고 있던 빵을 옆에 앉아서 나눠먹고 온 것이었다. 일하는 사람들 간식을 배가 부를 정도로 먹고 오면 어쩌느냐며 엄마는 혀를 끌끌 찼다.


오빠는 웃겼다. 내가 2학년, 오빠가 4학년이었을 때 내 생일파티에 꼭 자기같은 친구들 서넛을 데리고 와서 축하공연을 해주었는데 그 노래와 춤사위가 아직도 생생하다.

"타잔이 십원짜리 팬티를 입고 이십원짜리 칼을 차고 노래를 한다 아아아~타잔이 이십원짜리 팬티를 입고 삼십원짜리 칼을 차고 노래를 한다 아아아~타잔이 삼십원짜리 팬티를 입고...."

타잔이 마침내 백원짜리 팬티를 입을 때까지 이어지던 광란의 춤사위에 내 친구들을 모두 배를 잡고 바닥을 굴러다녔지만, 나만 홀로 오빠를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구석에서 혼란스러웠다.


오빠는 시샘이 많았다. 내가 태어났을 때 오빠는 네 살, 이제 막 장난이 피어오르는 시기이자 한창 관심받고 싶은 나이였다. 우는 동생을 안아 달래는 엄마 옆에서 오빠는 서서 오줌을 줄줄 쌌다고 한다. 기저귀 뗀 지가 언젠데 얘가 왜 이러느냐며 오빠를 데리고 병원을 찾은 엄마에게 의사는 기가 막힌 처방을 내려주었다. "속병이요잉. 갓난애야 울든 말든 안 죽으니까 놔두고 항상 큰애부터 챙기씨요." 시골에서 보기 드문 명의였다.

그러나 명의의 처방을 따를 수 없는 순간들이 엄마에겐 필연적으로 많았다. 작은 것은 등에 업혀 잠이 들고 양 손엔 짐이 한가득인데 저를 안아주지 않는다고 내내 떼를 쓰고 울면서 집까지 따라오는 오빠를 보며 엄마는 작심을 했다. 마당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싸리나무를 꺾어들고 종아리를 냅다 갈겨주었다. 그후로 다시는 안 그러더라고 했다.


오빠는 천식을 앓았다. 날 때부터 호흡기와 기관지가 약했던 오빠는 초등학교 내도록 천식을 달고 살았다. 수련회나 수학여행을 갔다하면 바로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택이가 숨을 못 쉰다는 전화에 엄마와 아버지는 올 것이 왔다는 듯 부리나케 차를 달려 오빠를 데리러 갔다. 오빠의 천식은 우리집의 우환이었고 엄마아빠의 싸움레파토리 1순위였다. 아픈 자식을 보는 건 속상한 일이다. 침대에 누워있다 화장실로 달려갈만큼의 숨이 부족해 침대에 토를 해버린 오빠의 엉덩이를 아빠가 걷어찼다. 걷어차인 건 오빤데 내 엉덩이가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빠도 속상해서 그랬을 것이다, 이해해보지만 아빠의 발길질이 나는 지금까지도 서운하다. 하물며 오빠는 어땠을까.


오빠는 포기가 빨랐다. 다섯 마리의 사자가 각각 머리 팔 다리가 되어 하나의 로봇이 되는 전설의 장난감, 볼트론은 오빠의 유년시절 최대로망이었다. 당시로선 거금이었던 삼만원은 애들 장난감에 쓰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엄마는 오빠를 설득해 그보다 한 급 낮은 아류장난감을 사주었고 짝퉁볼트론에 오빠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날 오빠에게 사주지 못한 볼트론은 엄마 마음에도 내내 앙금으로 남았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엄마는 내가 갖고 싶어하던 인형을 무려 오만오천원을 쾌척해 사줌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어내려 했다.


오빠는 성실하지 못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대개의 초등학생들이 그렇듯 오빠 역시 학습지를 미루다 엄마에게 혼이 나곤 했다. 오빠의 성적이 우리집에서 이슈가 된 적이 없었던 걸 보면 크게 효과를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엄마는 내게 학습지선생님을 두지 않았다. 내가 자발적으로 가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학원에 보내거나 과외를 시키지도 않았다. 앞서 오빠를 통해 많은 것을 체득하고 내려놓은 부모님은 나에게는 처음부터 자유를 주었다.


그러니 날 때부터, 오빠는 나의 보호자였다.


미우나 고우나 나에겐 붙들 사람이 오빠밖에 없었다. 엄마는 일을 했고 하루의 반은 유치원에, 나머지 반은 오빠에게 나를 맡겨놓았다. 태권도학원이 끝나면 오빠는 곧장 집으로 와야했다. 목이 빠져라 자신을 기다리는 동생이 있었으니까. 내가 자라면서 야물딱진 모습을 보이자 종종 엄마는 내게 (오빠몫의 차비까지 돈통에 넣는 일 같은)중요한 임무를 맡겼지만 무사귀가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오빠에게 있었다.  


여느 때처럼 내가 오빠몫의 차비까지 돈통에 넣고 버스에 오른 어느 날이었다. 곧이어 목적지에 다다르고 오빠가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바로 뒤따라 발을 내딛었는데 별안간 버스문이 닫혔다. 찰나였다. 버스가 출발하려는 순간 사색이 된 오빠가 버스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그 와중에도 나는 문 열어달란 말 한마디 못하고 오빠만 쳐다보고 있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기사님께 상황을 전달했고 기사님은 그제야 차를 세우고 뒷문을 열어주었다.

"멍청아! 빨리빨리 내렸어야지!"

안도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을 뱉어낸 오빠는 앞만 보고 혼자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빠에게서 받은 게 없다, 고 내내 생각했다. 

받은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내도록 내 앞에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여태 오빠의 희생으로 수혜를 누려왔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가 부모의 기대와 실망과 채근과 탄식을 앞서서 받아낸 덕분에 나에게는 그것들이 깊게 와닿지 않았다. 그가 짊어진 첫째의 무게만큼 나는 철부지로 남았다. 고작 30개월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원해서 먼저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나와 오빠처럼 딱 30개월 차이가 나는, 나의 첫째와 둘째는 미역국을 유달리 좋아한다. 미역국만 끓였다하면 저녁식사시간 내내 국자와 주걱이 바쁘다. 밥이 남아서 국을 더 먹고, 국이 남아 밥을 더 먹고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새 국냄비는 바닥을 보인다. 그 와중에도 둘째는 형아국을 먼저 퍼주었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왜 맨날 오빠부터 밥을 퍼주느냐고, 밥상머리에서 울어본 전력이 있는 구시대의 둘째는 제가 낳은 둘째의 패악질을 바라보며 그저 업보려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소고기미역국의 구수함도 좋고 새우미역국의 깔끔함도 좋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고, 그래서 잘 끓이게 된 미역국은 뭐니뭐니해도 바지락미역국이다. 달군 냄비에 참기름을 살짝 두르고 냉동바지락과 다진마늘을 동시에 넣어 볶는다. 바지락이 익어가며 나오는 맛있는 육수가 졸아들기 전에 불린 미역을 넣고 국간장 한숟갈, 달달 볶다가 뚜껑을 닫고 김이 날 때까지 둔다. 김이 나면 물을 붓고 푹 끓인다. 몇 안 되는 재료가 알아서 맛을 낼 때까지 그저 불과 시간에 맡겨둔다.


불 앞에 서서 미역국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오빠가 떠오른다. 바지락 미역국을 내놓으면 오빠는 소고기 미역국을 찾을까, 새우 미역국을 찾을까. 이제 서른을 훌쩍 넘겨 마흔을 향해 가는 그가 잠자코 수저를 들어 국물을 먹고 점잖게 밥을 뜬다면 나는 조금 서운할 것 같다.


나의 유년시절 기억들은 대부분 오빠의 그것과 맞닿아있다. 지금의 정서를 이룬 이 기억들 또한 상당부분 오빠에게서 온 것임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엄마, 소고기 미역국은? 엄마, 새우 미역국은?"

오빠 목소리가 들린다.

슬며시 웃음이 떠오른다.



*느자구없다 :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형편없음을 가리키는 전라도 사투리.

*구척스럽다 : 오래되어 거의 잊고 있던 사건이나 사물을 새삼스럽게 꺼낸다는 의미의 전라도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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