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필 Jun 22. 2021

눈치,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추

엄마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엄마의 '생명체에 대한 사랑' 을 얘기하자면, 아무래도 빠질 수 없는 녀석들이 바로 개. 날개가 돋아날 것 같은 복슬한 등을 가진, 녀석들에 대한 엄마의 애정은 각별하다. 엄마의 개사랑 이야기, 그 지난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잠시 머물다 간 눈치, 그 녀석 이야기를 할까 한다.


눈치는 버려진 강아지였다. 난 지 40일도 안 된 강아지가 일주일 동안 사람의 손을 전혀 타지 못하고 굶고 떨었다고 했다. 엄마는 아부지 몰래 녀석을 집에 데려왔다. 뒷베란다에서 씻기고, 닦고 하는데 녀석의 얼굴에서 뭔가 떨어졌다. 구더기였다. 비위가 약한 엄마는 기겁했고 곧 동물병원으로 녀석을 데려갔다.


어린 강아지라 눈물이 자주 흘러 눈 밑에 염증이 생겼고, 거기에 파리가 알을 깠다고 했다. 수술을 마친 후 집으로 다시 데려온 후에도 녀석의 눈 밑에서는 계속해서 피와 고름이 나왔고 애가 탄 엄마는 매일 저녁을 녀석과 함께 뒷베란다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때쯤 나는 녀석을 만났다. 아부지에게 존재를 들키는 바람에, 엄마와 함께 기차역으로 나를 마중나왔던 작고 어린 개.


툭 치면 떼구르르 굴러나올 것 같은 큰 눈, 두 눈 사이 거의 일직선으로 납작하게 들러붙은 코, 그 아래 역시 일직선으로 자리잡은 앙당하게 다문 입, 동글납작한 대가리에 주책맞게 귀를 덮고 있는 긴 털까지...그때까지 '시추'하면 떠올렸던 앙증맞고 우아한 이미지와는 딴판이었다.


아부지에게 눈치를 받고 있다 해서 녀석의 이름은 눈치가 되었다. 눈치는 장난끼가 넘치고, 호기심이 많은 데다가 겁도 없었다. 그렇게 아팠는데도 놀라울 정도로 밝은 녀석이었다. 엄마가 눈 밑을 닦아줄 때 눈치는 단 한번의 '깽'소리도 내지 않았다. 장난을 걸어 시간을 지체하게 하긴 했지만 아프다고 해서 달아나는 일도 없었다.


집 안을 유유히 돌아다니는 터줏대감 요크셔테리어를 베란다에서 마주봐야 했지만 집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낑낑대지 않았고 그저 저녁에 몇 번 놀아주면 그걸로 족했다. 밥 주고 물 주고, 다정한 손길, 눈길 한번이면 그걸로 녀석은 그만이었다. 우리가 주는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눈치와의 짧은 이틀을 보내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기차 안에서 눈치를 생각하다가, 곧 나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야만 했다. 곧 두번째 수능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눈치는 괜찮을 것이다. 엄마의 손이 닿아 살아나지 않은 생명은 없. 그러나 그 해는, 재수생 딸과 군인 아들을 둔 엄마의 상실감 때문이었을까. 집에 남은 엄마와 눈치가 자꾸만 돌아봐졌다.


서울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눈치는 다 나았느냐고 물으니 말끝을 흐리며 으응, 했다. 죽다, 라는 말은 전화를 끊을때까지 엄마도 나도 끝끝내 하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내가 가고 난 뒤 눈치는 내내 피를 누고 다녔다. 동물병원에서는 너무 어리고 약해 회복이 힘들 거라고 했다. 후에 엄마는, 그 순간 안락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고 고백했다.


차마 안락사시켜 달라는 말은 못하겠더란다. 그렇게 기쁘게 다시 찾아온 생을 사는 녀석에게서,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이유로, 돈이 든다는 이유로, 어떤 이유에서든지간에 다시 그 생명을 앗을 수는 없었다. 인간은 종종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반면, 인간 외의 그 어떤 생명체도 스스로 생명을 저버리는 일이 없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생명이 아직 손짓하는 한, 모든 생을 살아내고 미련없이 죽는 것이다. 우리에겐 돈이 얼마 들고, 시간을 빼앗기고, 하는 살아갈 인간들의 문제였지만 작은 강아지 눈치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엄마의 결정에 생사가 결정되는 그 애처로운 생명은, 그렇지만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눈으로 엄마를 바라봤을 게다.


결국 엄마는 돈과 시간을 들이는 결정을 내렸고 눈치는 생의 길로 한발짝 더 내딛은 듯 했다. 그 주 일요일이었다. 다음날 엄마는 눈치를 데리러 병원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외출 후 집에 돌아오니 부재 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군에 가 있는 아들일 거라 생각한 엄마는 아들 전화를 못 받았다며 속상해했다.


다음날, 수의사는 눈치를 보여주지도 않고 말끝을 흐렸다. 죽었다고 했다. 치료 도중 죽었을 것이다. 마취를 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깨지 않았다거나 해서 말이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애초에 녀석은 회복되기 힘들 정도로 야위고 지쳐있었다. 엄마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잦아들던 생명에 사람의 손길이 닿자 그 생명은 마지막 빛을 발했던 듯 싶다. 녀석은 마지막을 함께 지낼 누군가의, 턱을 기댈 수 있는 어깨, 귀를 비빌 수 있는 가슴, 작은 몸뚱이를 묻을 무릎이 필요해서 엄마에게로 왔다. 마지막으로 어깨와 가슴과 무릎을 내어준 엄마를 위해 열심히, 기쁘게, 일주일을 살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마지막을 보이지 않고 죽었다.


눈치는 죽었다. 집에는 녀석이 있었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눈치는 오기 전과 떠난 후를 똑같이 해놓고선 완연히 죽었다. 그래서 아주 나중에서야 눈치의 죽음을 알고도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두번째 수능을 치르고 난 바로 다음해였나, 아님 그 다음해였나. 우연히 친구의 핸드폰앨범을 구경하다가 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 흘렀다. 흔들리고 뿌연 사진이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시추였다. 내게도 시추가 있었다. 일주일만에 사람을 만난 기쁨으로 어리고 까만 눈동자를 빛내던 작은 강아지.


엄마와 나는 사진 속 시추처럼 뛰어노는 눈치의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낮엔 뒷베란다, 작은 상자 안에서 하염없이 우리를 기다려야 했고, 아버지가 잠든 밤에만 겨우 들어와 상처를 씻고 잠들었다. 참 이상한 녀석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를 볼 때마다 웃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개에게도 표정이 있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낼 수 있는 녀석들 특유의 표정이.


한낱 개 한마리 놓고 무슨 청승이 그렇게 기냐고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나는 좀 청승맞은 구석이 있다. 말 못하는 것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상황에 따르는 나의 알량한 박애주의를 호소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기억해주고 싶었다. 큰 눈 전체가 기쁨으로 빛나던, 엄마와 나의 개.


지금에 와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죽음의 순간을 누군가가 지켜주었기를. 수의사, 또는 다른 개라도 좋다. 감기는 녀석의 눈을 안타깝게 바라봐 준 두 눈동자가 있었기를. 그보다 더 큰 바람이 있다면 개들도 꿈을 꿀 수 있기를. 눈치의 마지막 꿈에, 그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제 작은 몸뚱이를 엄마 무릎 위에 누인 채 죽음을 맞이했기를. 안녕 눈치, 이제야 너를 보낸다.



- 표지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탈룰라와 느금마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