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엄마의 요건
승이언니와 북촌을 걸었다. 언니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두번째*로 편견이 없는 사람.
그 편견없음은 상당 부분 근거없음과 맞닿아 있어서 때때로 상대를 당혹스럽게 한다. 본인의 역량에 한계를 짓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가능성도 무한대로 본다. 가령, 무라카미 하루키와 박완서, 김훈 작가의 글을 '날필'의 글과 견주며 "네 사람의 스타일이 너무 다르다"고 말하는 일에 언니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쟁쟁한 세 작가님에 비해 나는 너무 짜치지 않느냐고, 듣는 사람도 없는데 민망해진 내가 서둘러 언니를 입단속하면, "야 너도 쟁쟁한 사람이야"라고 진심으로 말해버린다. 그런 점이 좋다.
아무튼 그날 승이언니와 나는 영등포 교보문고에 놓인 내 책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났다. 목적을 달성한 우리는 들뜬 기분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그래서 거기가 영등포였는지 북촌이었는지 삼청동이었는지 실은 잘 모르겠다. 장소가 중요하랴. 일요일 오전에 아줌마 둘이 집을 빠져나와 서울 한복판을 거닐고 있다는 사실이 중하지. 분명한 건 2022년 기준, '북촌을 걸었다'는 문장이 제일 힙하다는 사실이다. 고로 첫 문장은,
승이언니와 북촌을 걸었다.
각자 생각에 빠져 걷다가 불쑥 자기 얘기를 꺼내고, 상대가 뭐라든 나도 내 할 말만 하고, 그렇게 무근본 무맥락 대화를 주워섬기며 네다섯시간을 걸었다. 그 또한 언니의 입에서 맥락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야, 니 이적 엄마가 쓴 책 봤나?"
"아니? 왜?"
"그 아줌마가 청소를 안 했단다."
"오. 나도 청소 안 하는데."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고, 진짜로 아예 안 했단다."
"와씨, 진짜 좋겠다. 근데 왜 안 했대?"
"모든 걸 다 완벽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우선순위를 정해봤는데, 청소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제일 아깝고 버겁더란다. 그래서 그걸 그냥 놔버렸대. 집이 원체 더러우니까 동네애들 다 와서 엉망진창으로 놀고 가고 그랬단다."
'청소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제일 아깝고 버겁다'는 대목에서 나는 일면식도 없는 남의 모친에게 격렬한 하이파이브를 보냈다. 육아와 가사, 살림 중에 절대악을 뽑으라면 단연 청소를 꼽겠다. 정말이지 청소란 안 하면 대번에 티가 나고, 해봐야 하루를 못가는 하등 보람없는 노동이다. 방바닥에 먼지가 뭉쳐 굴러다니고 화장실에 물때가 끼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죄책감을 엉덩이로 누르며 타자질에 매진한다.
그런데 자식을 셋이나 서울대에 보내고,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유명저자가 청소를 하나도 안 했다니. 이 얼마나 신여성인가. 이 얼마나 획기적인가. 그거구나. 서울대생을 세 명 배출한 가정이라면 뭐가 달라도 다를 터. 이거야말로 엄청난 차별점이다. 청소를 안 하면 집안에 서울대생이 나올 확률이 높아지는구나! 그거라면 정말이지 자신있다. 어쩌면 나도 예비 천재엄마가 아닐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악뮤(AKMU)를 좋아한다. 일상에선 듣도 보도 못한 '본업을 즐기는 천재'캐릭터가 퍽 매력적이다. 글이 쓰기 싫을 땐 가끔 그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찾아본다. 천재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천재도 아닌 나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불끈 솟아오른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은 여전히 마우스에 머물러, 자연스럽게 악뮤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을 클릭하고 있다. 이놈의 알고리즘, 괜히 문명 탓을 해본다. 남매의 일상 티키타카를 감상하며 흐뭇하게 웃다가 갑자기 위화감이 들었다. 뭐지? 이 위화감의 정체는?
답은 남매의 밥상에 있었다. 오랜만에 본가를 찾은 남매에게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이, 일반적인 방송용 집밥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찜닭, 계란찜, 밥, 끝. 4인용 식탁이 광활해 보였다. 우리집 밥상도 1식 1찬일 때가 대부분이라 체감상 현실 집밥에 가까운 상차림이기는 했지만, 보통 방송에 등장하는 12첩 반상의 (집밥인 듯 집밥 아닌 집밥 같은) 집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화면 너머, 시간 너머에 앉은 내가 위화감을 느끼든 말든 남매는 아주 익숙한 동작으로 식탁에 앉았고, 달걀찜의 포슬포슬함에 감탄해가며 맛있게 식사를 했다. 또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천재 남매를 키워낸 엄마도 간소한 상차림을 지향하는구나! 아, 1식 1찬하는 집에서 천재가 나오는구나!
청소를 안 하는 집에서는 세 명의 서울대생을 배출했고, 상차림이 간소한 집에서는 천재 뮤지션 남매가 나왔다. 천재 육아의 키워드가 '청소 포기', '1식 1찬'이라면 내게도 가능성이 있다. 가능성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따놓은 당상이다. 정말로 나는 예비 천재엄마였던 것이다. 두근거림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좋다! 이제부터 더러운 집과 허전한 상에 죄책감 따위 가지지 않겠다. 살림에 들이는 노동력을 최소화하며 생긴대로 살자! 그때 문득 고개를 처드는 불안과 의문.
'애들친구들 매일 들락날락하는데, 우리집 더럽다고 동네에 소문나지 않을까?'
'카메라 앞에서도 똑같이 1식 1찬을 차려낼 수 있을까?'
아니, 절대 아니. 청소도 내려놓을 수 있고 집밥도 내려놓을 수 있지만 체면만은 내려놓을 수가 없다. 동네에 소문이 나든 말든 청소를 포기하는 강단, 카메라가 찍고 있어도 평소와 같이 상을 차려내는 패기, 모두 내게는 없는 것들이다.
남매와 마주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천재엄마의 화법에는 남다른 점이 또 있었다. 별난 소리를 하는 아들을 민망해하는 법 없이, 혹여 남들이 뭐라 하기 전에 지레 깎아내리는 법 없이,
"찬혁아, 네가 제일 웃겨."
"머리 속에 우주가 들었나 봐, 찬혁이는."
가볍게 툭 웃어넘길 줄 아는 여유, 초연함, 어른스러움. 얼핏 쉬워보이는 '청소 포기', '1식 1찬'이라는 키워드 뒤에 숨겨진 천재엄마의 진면모란 바로 저런 것들이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문호들과 나를 견주며 "너도 쟁쟁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승이언니를 보면서, 진정한 자유란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더랬다. 내가 남을 보는 시선에 편견을 섞지 않듯, 남이 나를 보는 시선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태도. 이런 태도로 바라보는 삶은 필시 남들보다 한꺼풀 정도는 가벼울 것이라고, 나는 내심 언니를 부러워했다.
박혜란 작가와 악뮤의 엄마, 승이언니, 세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세 사람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것, 그건 바로 '진정한 자유에 다다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일 것이다. 그들에겐 세간의 평가 따위 "음, 그래~" 사뿐히 즈려밟고 내 갈 길 가는 당당함이 있다. (속된 말로는 '개썅마이웨이'라고도 한다.)
'진정한 자유에 다다른 자'만이 천재를 키워낼 수 있다면, 나는 결코 천재엄마가 될 수 없겠구나. 그러니까 설령 내 아들이 어떤 분야에 두각을 나타낸다 해도, 그리하여 천재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해도, 그게 내 덕은 아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 말이다.
아 그래서 오늘 저녁은 찜닭.
물론, 다른 반찬은 없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