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안 좋아하는 오징어무침
아이를 키우면서 뜸해진 메뉴들이 있다. 청양고추가 들어간 된장찌개, 고추기름이 흥건한 제육볶음 따위가 그렇다. 그래도 어른 둘의 식도락을 위해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내 어떻게든 즐기곤 한다. 된장찌개는 아이들 몫을 덜어낸 뒤 청양고추를 넣고, 돼지고기 반 근은 아이들을 위해 간장양념으로 재는 식이다. 그러나 두 어른의 취향이 갈릴 땐 답이 없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들 중 굴국밥처럼 내가 안 좋아하는 음식이나, 감자탕처럼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은 뒤로뒤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남편은 대체로 해주는 밥에 감지덕지하며 맛있게 먹는 편이지만, 한 분기에 한 번씩은 먹고 싶은 음식을 어필한다.
"굴 제철이 언제지?"(굴국밥이 먹고 싶다)
"집에 감자 많던데, 감자탕 할라면 너무 일이 많제?"(감자탕이 먹고 싶다)
그러나 언제나 식사준비에 들이는 노동력을 최소화하고 싶은 나의 철벽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김장철 되면 어머님이 굴김치 보내주실거야." (안 해)
"알아? 감자탕의 '감자'는 사실 그 '감자'가 아니래." (안 해)
아내의 옛말이 안해라는데, 뭘 시켜도 '안해'서 아내가 아닐런지. 그런 안해의 심부름도 남편은 마다하는 법이 없다. 오늘도 이발하고 오는 길에 내가 부탁한대로 삼겹살과 비빔라면을 사들고 왔다. 그리고 미나리 한 단. 미나리? 한 단?
"하라아빠, 미나리는 왜?"
"삼겹살이랑 먹으면 맛있잖아."
삼겹살이랑 먹으면 맛있는 걸 누가 모르나. 문제는 미나리로 신을 삼아도 될만큼 많이 사왔다는 거다.
"이걸 다 어디다 써?"
"고기 먹고 남은 건 무쳐먹자."
"미나리만? 그게 맛있어?"
"냉동실에 오징어 있잖아. 오징어 데쳐서 미나리랑 무치면 쓰읍, 맛있겠다."
그 오징어로 말할 것 같으면 남은 삼겹살과 함께 오삼불고기가 되어 저녁식탁에 오를 귀한 몸이다. 한편으로는 남편이 직접 마트에서 사다가 손질해 얼려놓은 오징어이기도 하다. 사오지 말라고 그렇게 만류해놓고 사 온 오징어는 정작 내가 제일 잘 썼다. 심부름도 걱실걱실 잘해주고, 식재료도 꼬박꼬박 채워주는 남편. 이쯤되면 오징어 한 마리 정도야 군소리없이 해달라는 대로 해줄 법도 한데 꼭 어깃장을 놓는 게 또 '안해'의 특기다.
"오징어무침을 누가 좋아한다고?"
"나, 나, 내가 좋아해!"
"오징어무침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와...내는 사람이 아이가? 내가 좋아한다고!"
"나는 오징어무침 안 좋아해. 글고 애들이랑 같이 먹으려면 오삼불고기를 해야지."
"아...그건 그렇지. 알아서 해라."
남편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작업에 골몰하고, 나는 조심조심 작전에 들어간다. 냉동실에서 오징어를 꺼내 묵직한 스텐냄비에 물 없이 넣고 뚜껑을 덮는다. 오징어가 익어가는 동안 고추장, 고춧가루, 진간장, 식초, 사과농축액을 섞어 초장을 만든다. 태생이 같으면서도 둘만 있으면 좀처럼 섞이지 않는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진간장과 식초의 도움을 받아 맛깔스럽게 섞인다.
남편과 나는 퍽 다른 사람들이다. 단순 키워드만 나열해봐도 알 수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 이과생과 문과생. 남자와 여자(?). 태생도 다르고 형질도 달라서인지, 우리는 서로에게 제법 잘 스며들었다. 예민하고 무표정하고 날카로운 전라도 문과 여자는, 사람 좋고 잘 웃고 둥글둥글한 경상도 이과 남자가 미치도록 탐이 났다. 이과 남자를 꼬여낼 때도 문과 여자는 '식당이모' 전법을 썼다. "총각아 이거 먹어" "많이 먹어" "더 먹어" "뭐 해주까" "뭐 좋아해" 그러니 데리고 살면서도 한번씩은 잘 먹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잡은 물고기에게도 분기별 특식은 필요한 법이다.
통통하게 부푼 오징어 몸통은 식칼이 스치기만 해도 동그랗게 썰려나간다. 오징어와 미나리와 양파와 당근이 제법 그럴싸하게 버무려지면, 뜻밖의 메뉴에 기뻐할 이과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며 마음이 분주해진다. 점심에 먹고 남은 삼겹살도 따로 구워 아이들 몫으로 내놓은 뒤, 최대한 흥분을 감추고 이과 남자의 방을 향해 무심하게 소리쳤다.
"하라아빠, 밥 먹어!"
저녁메뉴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인지, 밀린 일이 많아서인지 미적거리며 식탁 앞으로 나온 남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아. 이기 뭐고?"
"오늘 안 먹으면 미나리가 갈 거 같아서 했다 진짜. 매번 그렇게 시들시들한 걸 사오면 어떡하냐."
머쓱함을 숨기려 새침하게 쏘아붙여봐도 흐뭇함에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은 감출 수가 없다.
숨도 안 쉬고 젓가락질을 하는 남편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하라아빠, 나밖에 없지?"
"진짜 니밖에 없다. 너무 맛있다."
"많이 먹어. 언제 또 할지 모르니까."
천천히 많이 먹어.
조만간 또 해줄게.
오징어무침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집에 없지만,
우리집에서 너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