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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맛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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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ul 12. 2020

빵반죽이 부푸는 시간

망친 빵반죽을 앞에 놓고 망쳐온 관계들을 생각하다

아무래도 이번 빵은 망한 것 같다.

냉장고에서 꺼낸 반죽은 조금도 부풀지 않았다.

오븐에 돌린다 해도 성공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

230도로 예열된 오븐에서 55분간의 전력을 소모해 이 반죽을 구워야 할까. 갈등이 됐다.

 



<만두> 편에서 밝혔다시피 나는 뼛속부터 내숭쟁이다. 엄마는 내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며 매번 집 안에서도 언행을 조심할 것을 종용했지만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사람이지 바가지여? 글고 밖에 나갈 땐 다 땜질해서 나가거든?"

바가지 아니라매. 땜질은 왜 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20년을 '집에선 마음놓고 줄줄 새는 바가지'로 살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나와 남편, 아이가 사는 거처가 곧 나의 집이 되었다. 집에서는 나를 무장해제해야 마땅하기에 나는 그때까지 남편에게 보이지 않던 바가지의 틈을 거침없이 내보였다. 남편 입장에서 보면 하자상품을 속아 산 셈이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반품절차도 쉽지 않을 뿐더러 바가지가 증식까지 해 새끼 바가지를 안고 있는 마당에. 그릇된 선택도 나의 선택이려니, 깨진 바가지나마 살살 달래가며 최대한 덜 깨진 쪽으로 쓰는 수밖에. 그래도 가끔씩은 바가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하루는 시댁과 관련된 일로 말다툼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중간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이미 몇번이나 실망한 뒤였고, 그날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화장실 앞에 놓여있던 빨래바구니를 양손으로 확 집어들었다. 던져버릴 심산이었다. 그렇게 싫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내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짧은 순간 손목에 제동을 걸었지만 여기서 그만두기엔 너무 모양이 빠졌다. 나는 시원스레 빨래바구니를 내동댕이쳤고 거실 바닥엔 젖은 빨래들이 너저분한 감정의 조각들처럼 널부러졌다.


눈에 보이지 않던 감정들이 거실바닥에 쏟아져나온 순간, 우리의 상처는 더 처참하게 너덜거렸다. 상처를 준 나도, 상처를 받은 남편도 할 말을 잃고 쏟아진 빨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이 먼저 나동그라진 빨래바구니를 일으켜 세우더니 빨래들을 하나하나 주워담기 시작했다. 다 주워담은 빨래를 화장실 앞에 가져다놓은 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 그래도 너한테 이런 취급을 받을 정도로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내가 주체하지 못하고 쏟아놓은 감정들을 남편이 치웠다. 배설물을 내보인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너 주변사람들한텐 경우 바른데 가까운 사람한테 좀 막 대하는 거 있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잘해야 돼."

저녁식탁 앞에서, 20년 전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을 남편이 그대로 했다. 남편의 말에 더 이상 코웃음칠 수 없었다.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 그래서 최대피해자, 남편.






망친 빵반죽을 앞에 두고 남편의 말을 곱씹어본다.


내가 만드는 빵은 재료가 퍽 간소하다. 밀가루와 물, 소금, 발효종만 있으면 된다. 이처럼 간소한 재료에 시간과 정성을 쏟으면 예쁘게 부풀어오른 천연발효빵을 얻을 수 있다. 처음엔 몹시 공을 들였다. 레시피대로 1그람의 오차도 없이 저울에 재료를 계량하고, 공정 사이사이의 1초를 지나칠까 타이머를 맞춰가며 시간을 엄수했다. 매 단계마다 애기다루듯 조심조심 반죽을 대했다. 세네번째부터는 제법 모양이 잡히기 시작했고 일고여덟번째에는 남에게 줄 수도 있을 만큼 모양을 갖춘 빵이 나왔다.


그렇게 채 열번도 안 되는 성공을 거둔 뒤, 나는 익숙함에 젖어 느슨해졌다. 처음 빵을 만들던 때의 경외감과 긴장감은 온데간데 없었다. 이 더운 여름날, 발효중이던 반죽을 잊고 외출을 하다니! 30분마다 한번씩 접어줘야 하는 반죽을 무려 세 시간동안 방치하고 만 것이다. 내가 긴장의 끈을 놓자 글루텐들도 서로를 놓고 축 늘어졌다. 뒤늦게 부랴부랴 나머지 작업을 마무리하여 하룻밤을 꼬박 냉장고에서 숙성했지만 반죽은 조금도 부풀지 않은 채였다.


부풀지 않은 반죽.

오븐에 돌려도 성공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

그렇다고 이 반죽을 버려야 할까.

아니. 비록 실패하더라도 내가 만든 덩어리, 마지막 공정까지 함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경건하게 팬을 예열한 뒤 신중하게 발효바구니 위에 덮었다. 하나가 된 팬과 발효바구니를 재빨리 뒤집어 발효바구니를 벗긴다. 발효바구니 아래 반죽을 감싸고 있던 한꺼풀의 천을 살살 벗겨주니 비록 작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빵반죽이 자태를 드러냈다. 잠시 방치하기도 했지만 뒤늦게라도 정성을 쏟고 보니 다시 또 이렇게 애틋하다.


반죽을 오븐에 돌려놓고 시큼한 반죽물이 배어든 천과 발효바구니를 집어들었다. 오븐에서 돌아가고 있는 반죽은 내 손을 떠났다. 이제부터는 다음 빵을 위한 뒷정리의 시간이다. 다시는 익숙함에 젖어 반죽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반성을 담아 천과 바구니를 야무지게 문질러 씻은 뒤, 볕이 잘 드는 베란다 창가 앞에 널었다.




지난 주말, 이웃 아빠가 실수로 자기 아이 다리에 생채기를 냈다. 아이아빠는 깊게 패인 아이의 상처를 보며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남자애들이랑 놀아주다 보면 그 정도는 예삿일이에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위로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문득 남편에게 미안해졌다.


애들을 재워놓고 남편과 마주앉았다. 

"혹시 기억나? 당신이 나 좀 쉬라고 큰애랑 자전거 타러 나갔다가 애가 발목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한달동안 유치원 못 보낸 적 있잖아."

"어어어. 그랬지. 그때 엄청 미안했지."

"그때 내가 엄청 짜증냈잖아.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공연히 일을 만드느냐고."

"그랬나? 기억도 안 난다."

"내가 그랬어. 당신도 엄청 놀랐을텐데. 놀라고 미안해서 잔뜩 풀이 죽어 있는 사람한테 내가 그렇게 매몰차게 굴었네. 미안해. 그때 참 여기저기 실수를 많이 했는데 당신한테 제일 많이 한 것 같아."

"괜찮다. 우리 다 힘들었지 뭐. 그래보이 지금이 좋은 줄을 알지."


뽀글.

기포가 솟아오른다.

우리의 관계가 부푸는 소리가 들린다.


여름볕에 바싹 마른 천과 발효바구니가 다음 반죽을 그러안으려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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