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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맛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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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Apr 22. 2020

우리집 김밥마스터는 누구인가?

재료를 손질하는 자 VS 김밥을 마는 자

※ 의식의 흐름 주의 ※


오전에 잠깐 앉을 시간이 나서 <여행의 이유>를 집어들었다. 책은 초반부터 흥미진진했다. 특히 사람은 중대한 순간에 주어지는 사소한 선택(카드결제냐 현금결제냐 같은) 앞에 잠깐 상황의 심각성을 잊게 된다는 대목에서는 매우 크게 끄덕거리게 되었다. 예를 들어 사형집행을 앞둔 사형수에게 사형장까지 가는 이동수단을 선택하게 하면 사형수는 그 순간 임박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잠깐 잊고 '계단으로 올라갈 것인가', '엘레베이터로 올라갈 것인가'라는 눈 앞의 선택지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열이면 열, 계단을 선택하지 않을까? 아무리 성미 급한 인간이라도 죽으러 가는 길에서까지 걸음을 서두르진 않을 것이다. 다가온 죽음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루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니까. 잠시 유예된 죽음 앞에서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밀고 당겨지는 다리근육, 몸에 감기는 옷의 감촉, 옷이 스치는 소리, 예고없이 쏟아지는 햇빛에 절로 감기는 눈꺼풀, 햇빛과 먼지가 섞인 냄새, 하잖으리만치 작은 생의 감각들을 마지막으로 붙잡아보고 싶지 않을까. 헌데 빠져있는 감각이 하나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 미각.


그러고보니 미국에서는 사형수들에게 죽기 전에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하나 고르라고 한다던데. 정말이라면 이건 보통 고민거리가 아니다. 결코 사소하지 않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이라니.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위계적이며, 하위단계 욕구가 충족됐을 때 비로소 상위단계 욕구를 지향하게 된다고 한다. 더 이상 욕구를 가져서는 안 되는 사형수에게 가장 하위단계의 생리적 욕구를 하나 들어준 뒤 생을 마감하게 하다니. 이걸 인도적이라고 해야 하나 잔인하다고 해야 하나.


내가 미국의 사형수라면 어떤 음식을 고를 것인가? 뭘 먹어야 후회없이 죽을 수 있을까? 개똥같은 생각이 구르고 굴러 여기까지 다다랐을 때 시계는 열두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며 아우성이었다. 책을 덮고 일어섰다. '내가 사형수가 된다면 마지막에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야 하는 중대한 결정을 유보하고 당장 눈 앞에 닥친 오늘 우리 가족의 점심메뉴라는 사소한 고민으로 마음이 분주해졌다.


그 순간 번뜩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김밥.


김밥을 먹어야겠다.

죽기 전엔 김밥을 먹어야겠다.

그리고 오늘 점심은 김밥이다.

중대한 결정과 사소한 고민이 동시에 해결됐다.





김밥으로 결정하고 나니 이번엔 손이 분주해졌다. 조리시간 사이사이 잠깐의 공백도 없어야겠기에. 서둘러 쌀통을 열어 여섯 컵을 일일이 세어가며 밥솥에 붓는다. 몇 줄의 김밥을 쌀 것인지 정해놓고 필요한 밥양을 계산해 쌀을 푸는 것이다. 이처럼 김밥을 만들기 위해선 쌀통에서 쌀을 푸는 순간부터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세심한 계산이 필요하다. 최대한 오차를 줄여야 재료는 남아도는데 밥이 똑 떨어진다든지, 재료는 다 떨어졌는데 밥만 덩그러니 남는다든지 하는 불상사가 없다.


밥을 안쳐놓고 재빨리 냉장고를 스캔, 김밥속이 될 만한 것들을 죄다 꺼낸다. 아쉬운대로 계란과 김치만 있어도 김밥을 싸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재료가 준비되었다면 볶는 순서를 정해야 한다. 화구는 네 개이고 스텐팬도 여섯 개나 되지만, 있는대로 다 꺼내썼다가는 김밥말이 전에 멍석말이를 당해도 할 말이 없다. 설거지를 남편이 하기 때문이다. 설거지거리를 최대한 적게 만들며 요리하는 것이 동거인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다.


팬은 두 개만 쓰기로 한다. 팬을 달구면서 볶을 순서를 정한다. 한쪽에서 햄 - 계란지단 - 당근 순으로 지지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우엉과 어묵을 순서대로 조린다. 이렇게 하면 중간에 한번도 팬을 씻지 않고 다섯개의 김밥속을 모두 조리할 수 있다. 단무지는 물만 빼서 체에 받쳐두면 끝. 그저께 먹다 남은 깻잎도 꺼내 씻었다.


갑자기 김밥이 먹고 싶어서 준비한 것치고 재료가 너무 갖춰져 있는 게 아닌가 싶을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이 글의 허점이다. 나도 그 점이 몹시 고민됐으나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다. 코로나 사태로 본격 칩거하게 된 2월 말부터 장을 볼 때마다 김밥재료를 사다 쟁여두고 있다. 토요일마다 소풍 기분을 내면서 김밥을 싸고, 일요일엔 구운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주말마다 김밥 먹으면 질리지 않아?
- 그게 뭔데?
아니 그러니까 매번 김밥만 먹으면 먹기 싫을 때도 있잖아?
- 그거 어떻게 하는건데?


김밥이 먹기 싫다는 건 도대체 어떤 기분인 것인가? 결혼식 뷔페에 가서도 김밥만 쓸어담는 통에 늘 동행의 빈축을 사는 것이 나다. 살면서 김밥이 먹기 싫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하면 보통은 과장이 섞였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오랜 김밥사랑을 증명하는 일화가 있다.


노량진 고시원에 살던 재수생 시절, 나는 새벽마다 박리김밥에서 김밥 한 줄을 사들고 학원으로 향했다. 새벽 6시도 되기 전부터 어두운 골목에 홀로 환히 불을 밝히고 나를 기다리던 노량진 박리김밥. 단돈 천원으로 살 수 있는 아침의 행복.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까만 봉지 속에서 흘러나온 참기름 냄새가 코를 자극하면 잠시동안은 나의 신분(재수생)도 행선지(입시학원)도 잊고, 곧 이 고소함의 극치를 입에 넣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신나게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애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상태로 혼자 낯선 서울 땅에 뚝 떨어져 그 와중에도 먹고 살겠다고 가슴에 김밥을 품고 학원으로 꾸역꾸역 걸어가는 모습이, 분명 내가 직접 겪은 일인데도 왜 더 초라하게 재구성되어 애처롭게 떠오르는지. 소녀여. 다 괜찮아진단다. 지나고보면 아무것도 아니란다. 보렴. 넌 결국 대학에 갔고 장학금도 받고 복수전공도 하고 조기졸업도 했지만 지금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잖니. 여전히 무언가 되기 위해 뺑이치고 있잖니. 인생이 그런거란다. 너만 뺑이치는 게 아니란다.


그때랑 달라진 거라곤 열아홉의 나는 돈 주고 김밥을 사 먹었고 서른넷의 나는 손수 김밥을 싸먹는다는 사실 뿐. 왠지 서른넷의 내가 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갑자기 입맛이 써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졌다. 왜 이렇게 되었더라. 아. 김밥. 아...침이 고인다. 왜 김밥에 한해서라면 나의 식욕은 이다지도 조건반사인 것인가.


잘 볶아진 당근이 낭창낭창하게 휘어질 때쯤, 다시 우리집 부엌으로 돌아와 가장 큰 접시에 준비한 재료들을 나란히 길게길게 늘어놓았다. 밥솥을 열면 여섯 컵의 쌀은 고슬고슬한 흰밥이 되어 솥을 꽉 채우고 있다. 주걱에 물을 묻혀 밥을 일고 양푼에 퍼 담는다. 식초, 설탕, 소금을 섞어 만든 단촛물을 밥에 골고루 붓고 잘 섞어준다. 쟁반 위에 김을 놓고 물을 담은 작은 종지와 비닐장갑도 옆에 둔다. 김발도 꺼낼까 하다 한달 넘게 재택근무 중인 남편의 방문을 두드렸다.


"하라아빠, 김발 쓸거야?"

"아니~"

"준비 다 됐어, 이제 말아주라!"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남편의 시간이다. 식탁에 앉은 남편이 재료의 가짓수와 각 재료의 양을 가늠한 뒤, 경건하게 첫 김을 깔고 엄숙하게 첫 밥을 얹는다. 두세 줄까지 재료의 배치를 달리해가며 말다가 마침내 본인 마음에 흡족한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면, 그대로 열두 줄을 말아낸다. 여섯 컵의 쌀이 정확하게 열두 줄의 김밥으로 치환되는 매직은 몇 번을 봐도 신묘막측하다. 어쩌면 밥도 햄도 계란도 당근도 어묵도 우엉도 단무지도 저렇게 딱 떨어지게 김밥 열두줄 안에 담아내느냔 말이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사람에게 막연한 안정감을 준다. 일년은 열두 달, 모두가 기다리는 점심 시간도 열두 시, 하루를 마감하는 시각도 열두 시, 예수의 열두 제자, 열두간지 꾸러기수비대,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아니 이건 너무 갔고. 아무튼 뭔가 삼라만상의 진리가 담긴 듯한 이 숫자만큼, 딱 열두 줄의 김밥을 매번 정확하게 말아내는 남편의 솜씨에 나는 늘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과연 이 김밥은 남편과 나, 두 사람 중 누가 만들었다고 해야 옳은가? 물론 두 사람이 함께 만들었음이 분명하지만 어느 쪽이 김밥제조에 더 많이 기여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만든 이 김밥이 한 편의 논문이고 우리가 공동저자라고 한다면 누구의 이름을 더 앞에 써야만 하는가.


재료준비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재료마다 적당한 양을 가늠하고, 각기 다른 조리법으로 맛과 영양을 살려야 한다. 당근은 기름에 볶고, 계란은 약불에 부치고, 우엉은 진득하게 조려야 제맛이다. 단촛물의 비율을 맞추는 일 또한 오랜 경험치가 쌓여야만 가능하다. 밥의 상태에 따라 매번 비율을 달리할 필요가 있으며, 다른 재료와 어우러졌을 때의 맛을 가늠해서 간을 맞춰야 한다. 그러니까 김밥재료를 준비한다는 것은 완성된 김밥의 양과 맛을 시뮬레이션해가며 각 재료의 양과 간을 조절해야 하는 신중한 작업이다. 


김밥말기는 또 어떤가. 김 위에 밥을 균일한 두께로 잘 펴서 깔아준 뒤 각 재료를 조화롭게 배치한다. 설령 밥이 질어서 손에 달라붙어도, 양조절에 실패해 특정 재료가 부족하다고 해도, 재료를 준비한 사람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여기서부터는 온전히 김밥을 마는 사람의 역량인 것이다. 앞 사람이 준비한 재료를 그대로 넘겨받아 부족함을 보완해가며 한 줄의 김밥으로 말아내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옛 말의 권위에 기대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쯤 되면 인용하지 않을 수 없겠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듯이, 김밥재료가 제 아무리 완벽하게 갖춰졌다 한들 말지 않으면 밥과 김과 반찬일 뿐이다. 애초에 '김밥을 만든다'는 말보다 '김밥을 싼다'는 표현이 주로 쓰인다는 사실에서 김밥이라는 음식의 가치는 '싸는' 행위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집에서 김밥을 제조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은 공은 남편에게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김밥 마스터 자리는 남편에게 내어주고 묵묵히 마스터를 보좌하는 임무에 충실하기로 한다. 마스터의 손에 밥알이 달라붙지 않도록 단촛물의 농도와 밥 짓는 시간을 조절하고, 모든 재료가 딱 맞아떨어지도록 계량에 만전을 기해야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거장의 작품을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오늘의 김밥에 감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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