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차 주부도 넘어설 수 없는 맛 이상의 맛
남편은 집에서 먹는 저녁밥에 필요 이상으로 감동한다.
"이야 이게 집에서도 만들어지는 거가? 가능하나?"
"어떻게 다 맛있지? 얘들아, 엄마 진짜 대단하지 않나?"
경상도 남자로서는 최대치로 끌어올린 리액션을 동원해 매번 호들갑스럽게 고마움을 표하는 그가 유일하게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음식이 있다. 어디까지나 남편피셜, 한국인의 소울푸드라는 '된장찌개'다.
10년을 같이 살면 안다. 입에 들어갔던 숟가락과 함께 나오는 남편의 외마디 "캬" 가 "키야~" 인지 "ㅋ..아.."인지. 나름대로 열심히 반응을 한다고 하는데 첫 숟갈에 못내 시원찮음이 묻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더군다나 집에서 아무도 즐기지 않는 된장찌개를 본인의 요청으로 기껏 끓여주었건만 저 김 빠진 반응은 뭐란 말인가.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싶어서 재료도 바꿔보고, 레시피도 바꿔봤다. 재료라고 해봤자 파, 마늘, 고추, 감자, 두부, 양파, 버섯, 애호박 중에서 한두개 더하고 빼는 정도이고, 레시피라고 해봤자 된장을 채소보다 먼저 넣을지 나중에 넣을지, 된장을 체에 걸러 넣을지 그냥 넣을지, 마지막에 고추장을 조금 넣을지 말지 정도의 선택지가 전부다. 이 몇 안 되는 된장찌개 재료와 레시피를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가며 모든 가능한 경우의 수, 모든 가능한 된장찌개를 다 끓여내봤지만 남편의 반응은 늘 한결같았다.
이런 된장, 찌개가 뭐라고. 오히려 애들 먹이려고 급하게 끓인, 미역과 두부만 들어간 심심한 된장국에 뜬금없이 감탄사를 남발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된장찌개는 나에게 기피 1순위 요리가 됐고, 남편은 종종 지나가는 말로 된장찌개를 들먹거리긴 했으나 뭐 그리 간절해보이진 않았다.
갑작스럽게 답을 찾은 건 시댁에서였다. 아들내외가 내려가면 매끼 상에 별미를 올려야 한다는 고민으로 마음이 분주하신 시어머니가 그날은 영 떠오르는 게 없으셨던지 하나뿐인 아들에게 친히 물으셨다.
"완아, 니 먹고 싶은 거 없나. 뭐를 좀 해주면 맛있다 하겠노."
모두의 시선은 일제히 시어머니 아들의 입으로 향했다. 아들은 잠깐 생각하더니 아, 지금 막 떠올랐다는 듯이 "된장찌개나 먹을까요?" 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된장찌개를 입에 올리면서 힐끔 내 눈치를 보느라 급히 굴러왔다 화들짝 다시 굴러간 시어머니 아들의 눈동자를.
시어머니는 명절에 집에 와서 뭐 그런 게 먹고 싶냐, 먹어본 게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하시면서도 주섬주섬 파, 양파, 감자 따위를 여기저기서 꺼내오셨다. 무슨 재료가 들어갔는지, 어떤 레시피로 끓이셨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아주 평범한 맛이었다는 것. 엄청나게 맛있지도 과히 맛없지도 않은 여느 집 된장찌개와 같은 맛. 사실 무얼 넣고 어떻게 끓인들 된장찌개에서 얼마나 대단한 맛이 나겠는가. 제 아무리 최상의 조합이 존재한다 해도 완성작은 그저 된장찌개일 따름인 것을.
시어머니의 된장찌개를 먹어보고서야 알았다. 이건 내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영역이라는 걸. 남편에게 된장찌개란 곧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를 의미했다. 된장찌개만큼은 아내에게 내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롯이 엄마의 것으로 기억하고 싶은 맛. 그런 맛 하나쯤 남겨두고 싶은 마흔 남자의 감성. 지켜주리라. 하지만 10년차 주부로서의 내 자존심도 지켜내리라.
오후 다섯 시, 본요리를 하기에 앞서 서둘러 쌀부터 씻는다. 쌀뜨물이 필요해서다. 뿌연 쌀뜨물 반컵이면 충분하다. 애호박과 양파를 잘게 다진다. 꼭 애호박이 아니어도 되지만 애호박이 있고 없고에 따라 맛이 아주 달라진다. 우렁이는 미리 데쳐 다진마늘, 후추, 맛술, 참기름에 버무려놓는다. 참기름 두른 팬에 호박과 양파를 달달 볶다가 고추장, 된장, 고춧가루, 다진마늘을 한데 섞어 만든 쌈장과 아까 버무려둔 우렁이를 넣고 계속 볶는다. 국물 없이 자작자작해지면 쌀뜨물을 붓는다. 두부, 파, 고추를 넣고 바특하게 조린다.
된장찌개로 주춤했던 주부 10년차의 명성을 되찾고도 남을 아내의 변화구.
오늘 저녁은 강된장찌개다.
너른 대접에 밥 한공기, 강된장찌개 한 국자, 계란후라이에 구운김. 한데 슥슥 비벼 한술 뜬다. 비로소 안팎으로 만족스러운 남편의 "캬"가 저녁식탁에 올랐다. 뭘 넣었는데 이렇게 맛있냐는 남편의 너스레에 짜릿하게 한마디, 기어이 참지 못하고 찌질하게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냥 있는 거 넣고 대충 했는데 그래. ...맛없는 걸 해봤어야지 어디."
짜릿함과 찌질함이 한 데 섞인 설욕의 맛, 강된장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