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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Apr 04. 2023

쭈꾸미를 씹으며 송중기를 논하다

우리가 씹은 것은 쭈꾸미인가, 송...

***작년 12월의 일화인 고로, 시기에 맞지 않는 표현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동네언니들과 둘러앉았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각자의 근황을 나누다 시계가 11시를 넘어갈 때쯤, 오늘의 모임 주최자이자 공부방 선생님인 정이언니가 초조한 듯 입을 뗐다.

"오늘은 나가지 말고 간단하게 먹자. 애들 4교시라 일찍 내려와."

"그래 그래, 시켜먹자."

마찬가지로 공부방 선생님인 유이언니도 의견을 보탰다. 과연 저 정도 판단력과 추진력은 있어야 공부방을 운영하나 보다, 두 공부방 선생님에게 내심 감탄하고 있는데 줌바 교실의 만년 모범생, 소이언니가 모두를 휘 둘러보며 가장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뭐 시킬까?"

"쭈꾸미?"

똑소리나는 무인카페 사장님 혜이언니가 정답을 외치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제히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만장일치로 메뉴를 정한 우리는 쭈꾸미를 기다리며 온갖 잡다한 이야깃거리들을 씹어제꼈다.


티없이 맑은(반어법 주의) 남편 자랑(반어법 주의)에 여념이 없던 정이언니가 갑자기 심각하게 양손을 모으며 몹시도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송중기 소식 들었어?"

일순 정적이 흘렀다. 뉘 집 아들래미 이름이 송중기였던가, 애들 친구 중에 송중기라는 애가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송중기가 그 송중기라는 걸 깨닫고 왁자그르르 웃음이 터졌다. 그동안 드문드문 호소했던 정이언니의 송중기 사랑, 어쩌면 송중기 사랑을 빙자한 신세한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이언니, 그이는 누구인가. 그녀는 사실 송중기보다 박서준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러나 본인이 해당배우를 좋아하는 것과 그 막내아들의 이름이 '이서준'인 것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효심 가득한 그녀의 귀여운 막내아들 '서준'군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엄마를 위해 이름을 '서준'으로 개명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혀 모친을 기함하게 했다.

"아서라 서준아, 그러지 마라. 서로 좋을 거 하나도 없다."


정이언니, 그이는 왜 그럴까. 박서준도 아닌 송중기의 소식에 왜 매번 열을 올리는 것인가. 세기의 커플, 송송커플의 결혼 소식에 슬픔을 느낀 것이 어디 한 두 사람이었으랴만, 내 지인 중에 그토록 비탄에 잠긴 것은 당시에도 정이언니 하나 뿐이었다.

"야야, 이게 말이 되냐. 송중기랑 송혜교랑 결혼을 한대. 이게 나라냐."

"아니, 넘이사 결혼을 하든 깨를 볶든 뭐가 그러게 분하우?"

"얘, 봐라. 두 송씨가 다 잘나가는 배우 아니냐. 둘 다 얼마나 재산이 많을 거니. 이렇게 자수성가한 부자 둘이가 각각 서민을 만나서 결혼을 해야 부의 재분배가 이뤄질 거 아니니. 이렇게 부자끼리 자꾸 만나면 부자만 왕부자 되고, 우리 같은 서민은 어떻게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냐 이 말이야."


송씨 여배우와 송씨 남배우가 누구랑 결혼을 하든,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행운의 주인공이 누가 되든 간에, 우리는 그 사다리에 발 한 번 걸쳐볼 수 없는 아줌마들인데, 언니는 왜 저렇게까지 부의 재분배에 진심인 걸까. 그토록 부의 재분배에 진심이라면 연예 기사보다는 경제, 정치 기사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언니의 (영문 모를)화를 돋구고 싶지 않았으므로 굳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쩌면 본인의 농담같은 신세 한탄이 훗날 저 예쁜 커플의 결별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까 하는, 타고난 "사서 걱정러" 기질 때문인지 막상 송송커플의 결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코멘트가 없었던 정이언니가 오늘 뜬금없이 송중기 얘기를 꺼내는 걸 보니, 이거 또 무슨 사단이 난 게 틀림없다.


"송중기가 또 왜?"

"아니 송중기가 글쎄. 휴. 아니다. 그냥 빨리 찾아봐. 직접들 봐."

선천적으로 손이 느리고 대체로 호기심이 없는 나는 나머지 세 언니들이 검색을 마치기만 기다렸다.

"어머, 영국여자? 어머어머."

"어머 웬일이래?"

송중기가 영국인을 만나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 영국인이 일반인인 모양이다. 직접 찾아보지 않아서 그 이상은 모르겠다. 언니들의 감탄사와 입에 오르는 단어들로 미루어보아 그런 것 같았다.


타이밍 좋게 쭈꾸미가 왔다. 어느새 송중기는 잊혀졌다.

"어제 정이언니 땜에 심쿵했잖아. 나 교문에서 어머니폴리스하고 있는데 춥다고 나와서 장갑 끼워주고 가고."

"어우, 정이 쟤가 진짜 은근 쏘스윗이야."

쏘핫한 쭈꾸미를 야무지게 집어들며 쏘스윗한 정이언니가 쏘 비장하게 말했다.

"난 다음 생엔 남자로 태어날 거야. 그래서 우리집 맑음 씨같이 맑디 맑은 사람 말구, 진중하고 현숙한 여자 만나서 결혼할 거야."

잠자코 쭈꾸미만 집어넣는 편이 나았을텐데, 나는 기어이 입을 열어 속에 든 말을 뱉았다.


"아마 그렇게 안 될 거야."

"왜?"

"그 부의 재분배 이론 있잖아. 그런 것처럼, 인성의 재분배도 이뤄지는 거 같아. 진중한 사람과 맑은 사람이 만나서 중간 지점을 찾아가는 거지. 아마 언닌 남자로 태어나더라도 결국 맑은 여자를 만나게 될 거야."

"얘 그런거니. 혼자 살아야겠다."


이렇게 우리의 쭈꾸미회동은 때늦은 비혼선언으로 끝이 났다.

그래도 난 지금이 좋다우.

애가 있으니 언니들을 만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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