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리얼 치질 수술기(1)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 눈을 감고 음악에 의식을 맡기면 자연스레 펼쳐지는 목가적인 풍경. 저 멀리 평화롭게 풀을 뜯는 양떼와 양떼를 모는 목동들. 그리고 평원을 가득 메우는...살 타는 냄새? 어디서 양을 잡나? 불현듯 양고기가 먹고 싶었다.
"항생제에 과민반응이 있는지 확인하는 건데요, 이게 오늘 하는 것 중에 제일 아픈 거예요."
팔 안쪽 살갗에 포를 뜨듯 얕게 주사바늘을 찔러넣으며 간호사가 말했다. 나름의 위로였겠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두 아이 출산 때도 경험했던 항생제 반응검사의 통증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건, 그 통증의 강도가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다는 방증일 터. 뇌리에 스치지도 못한 통증을 치질 수술의 고통에 비하랴. 절망의 바다에 담궈지기 앞서 선의의 거짓말로 희망을 한 방울 떨어뜨린다 한들, 다가올 절망의 농도가 희석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어라. 섣불리 희망을 품지 말라.
수술실엔 내 발로 걸어갔다. 고통에 몸부림쳤던 아침 배변 후 미처 해결하지 못한 변의가 남아있었기에 수술 전 관장을 예상하고 잔뜩 겁을 먹었다. 아침에 변을 봤고 공복이라고 했더니 의외로 관장은 패쓰. 맘 속으로 예쓰를 외쳤다. 지금의 동구와는 배변활동을 포함한 어떤 활동도 도모하고 싶지 않다. 설령 수술대에서 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수술 직후 간호사에게 "저 똥 쌌어요?" 따위의 질문만 던지지 않으면 거대한 우주 속 작은 티끌로 사라지고 말 일이다.
수술방은 서늘했다. 내 마음이 추웠는지, 실내온도가 추웠는지는 모르겠다. 수술대에 오르자 무릎을 끌어안은 채 등을 한껏 구부리게 시켰다. 수술 부위를 보고 국소 마취와 하반신 마취 중 택일한다더니, 하반신 마취로 진행할 모양이다. 이쪽에서도 환영이다. 지금만큼은 동구와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싶지 않다. 이제부터 시작될 고통은 오롯이 동구만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진짜 새 동구로 태어나길 누구보다 응원하는 바이다.
서서히 발끝부터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수술실 간호사의 지시대로 괄약근을 조이려고 시도해봤지만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콧구멍을 조이려는 시도처럼 무력했다. 원체 말을 안 듣던 동구야 그렇다 쳐도, 두 다리마저 내 것이 아님을 깨달았을 땐 좀 당황스러웠다. 하반신이 상반신을 따라오지 않으니 혼자서는 엎드려 누울 수조차 없다. 뜻밖의 인어공주 체험. 왜 수술실에만 남자 간호사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비록 <공주님 안기>까진 아니었지만, 그는 공주를 대하듯 섬세하게 내 하반신을 뒤집어 주었다.
"기계 소리 때문에 시끄러우실 거예요. 음악 틀어드릴게요."
사회화된 성인들의 언어로 속삭이며 다정하게 헤드셋을 씌워주는 간호사의 마음씀에 인류애가 피어올랐다. 어찌 모르겠는가. 동구가 속속들이 까발려지는 현장에서 나의 청각이라도 분리해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려는 섬세한 배려를. 그 말을 그렇게 해 줘서, 애꿎은 기계 소리를 탓해줘서 고마웠다.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눈을 감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곧 눈앞에 펼쳐지는 넓고 푸른 초원. 저 멀리 평화롭게 풀을 뜯는 양떼와 양떼를 모는 목동들. 그리고 평원을 가득 메우는...살 타는 냄새? 어디서 양을 잡나? 아니, 무자비하게 잡히는 건 동구였다. 동구 지지는 냄새를 맡고 입맛을 다시다니. 에비, 지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눈을 감았다. 황금빛 조명이 은은하게 실내를 감싸는 무도회장. 귀족들의 사교파티다. 쟁반을 든 서버는 유영하듯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고, 저마다 한껏 차려입은 게스트는 서로의 맵시를 추켜세우며 친교를 나눈다. 그들의 중심에 선 오늘 나의 패션은...하의실종. 진짜 실종. 오, 센세이션!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다. 양떼가 가득한 초원도, 친교로 가득한 무도회장도, 어디를 떠올려도 거기엔 하반신을 훤히 내놓은 내가 있다. 그런 내 모습에 소스라치며 눈을 뜰 때마다 수술대 위로 돌아온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비현실인가? 그냥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중간중간 아랫배가 당겨지는 감각 또한 나의 내장이 건드려지고 있는 현실을 실감하게 했다. 차라리 잠이라도 들면 좋겠다.
50여분에 걸친 수술이 끝나고 배우 백현진을 닮은 수술의(진료실과 수술실의 의사가 다른 사람이었다)는 나직하게 소회를 밝혔다.
"치질이 심했어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나. 심하니까 수술이다. 죽을 만큼 아파서 수술을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저 말을 한다는 건, 막상 까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했다는 뜻이겠지. 새삼스레 충격적일 것도 없었다. 그토록 심한 치질에서 벗어나게 되어 후련하고 또 후련했다.
그때는 그 말에 숨은 진의를, 그리하여 앞으로 맞이하게 될 파장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