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필 Sep 08. 2023

아픔이 후두부를 강타할 때

그때가 수술 타이밍이다

"제가 치질 3기에서 4기쯤 되는 거 같은데...저도 치질수술을 해야 할까요?"

과부 사정 과부가 안다고, 전문가도 아닌 나(37세/치질수술 경험자)에게 애매한 질문을 던지는 그대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 "이럴 시간에 병원에 가 보라"는 지극히 맞는 말 대신, 다소 어리석게 들릴지라도 '경험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주겠다.


"해야 할까요?" 소리가 나오면 아직 멀었다. 수술을 할까 말까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고통을 일시불로 땡길지, 할부로 겪을지는 스스로 선택하라. 할부로 치르는 통증을 어르고 달래가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도 있고, 서서히 통증의 강도가 올라가 언젠가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될 이도 있다. 그러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내일도 이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체없이 병원으로 향하라. 그때가 되면 의사가 말려도 수술을 강행할 결단력이 저절로 생긴다.



 

2022년의 뒤끝 사건은 동구의 회복과 함께 희미해졌다. 한동안 동구는 밖으로 나도는 일 없이 고분고분하게 제자리를 지켰다. 희망이 보였다. 이대로면 수술 없이 40대를 맞이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래, 수술을 할 때 하더라도 시기는 최대한 늦춰보자! 규칙적인 플랭크와 케겔 운동을 지속하며 반려동구의 수명연장을 꿈꿨다.

'동구야, 우리 딱 마흔 살까지만 같이 늙자. 마흔 되면 새 동구로 갈아줄게.'


그렇게 무사동구로 1년을 보내며 단꿈을 꾸었다.

'요즘만 같으면 수술 없이 살 수도 있겠는데?'

단꿈, 전문 용어로는 사망 플래그라고 한다. 쓸데없는 대사 치면 죽는 거다. 헛된 희망을 품으면 나락 가는 거다. 어김없이 2023년에도 5월은 왔고, 다시 똥꾸러기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 말썽쯤이야, 동구의 전력으로 보아 2-3주 내로 잡힐 통증이다.


아침엔 피를 보고 저녁엔 약을 넣는 일상을 2주쯤 반복했을 때, 쌔한 느낌이 왔다. 2주가 지났는데도 통증이 잡히기는 커녕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배변 후 동구를 집어넣는 일은 눈곱을 떼어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위였는데, 때문에 내가 동구를 넣고 있다는 의식조차 없이 해당 의식을 치르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동구를 넣을 때마다 악 소리가 나게 아팠다. 칼로 베이는 듯 날카로운 통증에 나도 모르게 "스읍-" 신음 소리를 흘렸다.


3주쯤 되자, 화장실 가는 게 두려울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다. 아침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는 변의가 원망스러웠다. 왜 사람은 들어가는 구멍과 나가는 구멍이 다를까. 입으로 먹었으니 입으로 내보내면 안 되는 걸까. 정신 나간 생각을 하며 변기에 앉아 최대한 동구를 사리던-사리면서 벌려야 하는 이 아이러니- 바로 그 때였다.  


배출과 동시에 강한 통증이 후두부를 때렸다. 뒤통수의 뉴런이라도 한 줄기 끊어진 게 아닐까. 뒷목을 잡고 쓰러지던 드라마 속 중년 남성들이 떠올랐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손이 벌벌 떨렸다. 이대로 정신을 잃는 것도 무서웠지만, 맨정신으로 고통을 참으며 다시 동구를 밀어넣어야 하는 현실이 더 끔찍했다.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동구를 여미고 나는 바로 병원을 찾았다. 대도시고 나발이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항외과로 갔다.


"이거...치핵이 찢어졌네요."

초면의 의사는 내 얼굴보다 동구를 먼저 만났다. 잔뜩 흐트러진 동구의 첫인상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내시경 카메라에 비친 화면 속 동구를 보며 나는 잘 익은 망고스틴을 떠올렸다. 8시 방향에 한 줄기 붉은 줄이 가 있다는 것만 빼면 나의 망고스틴은 건재했다. 아니, 동구가 망고스틴화된 시점에서 이미 건재하지 못하구나.

사진 출처 : pxhere.com 무료이미지


항문외과는 진료실이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다. 동구를 마주하는 방과 얼굴을 마주하는 방. 내 동구와는 구면이겠지만, 나와는 초면인 의사는 이쪽방에선 제법 진중하게 눈을 맞췄다. 방금 저쪽방에서 흉측하고 망측한 것을 마주했던 사람답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인상이 퍽 온화한 것이 배우 안성기 씨를 닮았던 것도 같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얼굴로 마주한 날보다 동구로 마주한 날이 더 많은 탓이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커피엔, 프리마> 같은 톤으로 그가 물었다.

어떻게라. 아직도 내게 선택지가 남았나? 이대로 돌아가 내일 아침에도 동구를 한껏 오므리며 벌려야 한다면, 후두부를 스치는 날카로운 아픔에 몸서리쳐야 한다면, 차라리 다음 아침이 없는 편이 낫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수술해 주세요."

"내일 오전은 어떠세요?"

"아니요. 오늘이요. 지금 당장이요."

"...네, 알겠습니다."

의사의 눈빛에 뭔가가 스쳤다. 그건 연민일까, 결의일까, 또는 단순히 웃음을 참느라 눈동자가 흔들린 걸까. 그럴 리가. 지나친 피해의식이다. 이게 다 동구에게 시달려 정신이 피폐해진 탓이다. 오늘로써 동구와 나는 새 삶을 얻는다. 새 동구에 새 정신이 깃든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병원은 규모가 큰 만큼 체계적이었다. 수술 절차와 주의사항을 듣고 수술동의서에 사인한 뒤, 직원을 따라 윗층으로 올라갔다. 입구에서 대기중이던 수술실 간호사가 능숙하고 상냥하게 나를 이끌었다. 그의 상냥함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알맞아서 수술을 앞두고 위축되어 있던 마음에 적잖이 위안이 됐다.


입원실은 2인 1실이었다. 왼쪽 침대에 나보다 먼저 수술을 받게 될 환자가 누워 있었다. 내 또래로 추정되는 그는 질문이 많은 스타일이었다.

"수술 받으면 오늘은 밥 못 먹어요?"

"수술 많이 아파요?"

"수술하고 바로 걸을 수 있어요?"

하나같이 사소한 질문들이었지만, 또 무진장 궁금한 것들이어서 내심 고마웠다.


먼저 수술실로 향했던 그는 30분만에 돌아왔다. 마취 때문일까, 아까의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고요 속에서 간호사가 그의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소리만 사락사락 들렸다.

"저, 똥 쌌어요?"

멈칫.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손길이 멈췄다. 내가 틀렸다. 하반신 마취 따위로는 결코 그의 호기심을 꺾을 수 없다.


힘겹게 입을 열어 뱉은 첫 질문이 수술 중 배변 여부라니. 그게 왜 궁금한데. 그게 뭐가 궁금한데. 쌌으면 가서 치우기라도 할 셈인가. 정말이지 아무 쓸데없는 질문이다. 잠시 당황하던 간호사는 곧 포커페이스를 되찾았다.

"...어...똥이요? 어...잘 모르겠는데...선생님은 별 말씀 없으셨어요."

쌌네 쌌어. 거 애가 좀 쌀 수도 있지! 좀 싸면 어때. 남은 여생 잘 싸려고 온 건데 시작부터 좀 싸면 어떠냐고. 


허스키 보이스로 질문 세례를 퍼붓던 나의 치질 수술 동기, 물음표 살인마 씨.

지금쯤 그는 쾌적한 동구로 어딘가에서 또 물음표를 던지고 있을는지.

그의 쾌유를 진심으로 빈다.

물론, 나의 쾌유도.

이전 04화 뒤탈이 나면 뒤끝이 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