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중학교 때였다
열심히 살고 싶었다. 간헐적으로 열심히 살고 싶은 의지를 불태웠지만, 번번이 불타는 건 동구였다. 동구 버닝으로 열정 버닝이 꺾이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동구의 굴레 속에 나는 점점 <될대로 되라>식 인간이 되어갔다.
아버지는 내게 두 가지 자질을 물려주었다. 첫째는 다혈질, 둘째는 치질. 다혈질들은 필연적으로 기분파라는 사실을 아시는지. 기분파 아버지는 고기만 구웠다 하면 술을 찾았고, 두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간혹 기분이 몹시 좋아 한 잔을 비우기라도 했다간 저녁 내 딸꾹질에 시달렸다.
"저 양반은 술맛도 모르면서 술타령이다."라고 핀잔을 주는 엄마의 주량이래봤자, 꼴랑 맥주 반 병. 도대체 술맛이란 게 뭐길래, 잘 알지도 못하면서들 빠져드는 걸까. 늘 궁금했다. 어쩐지 맥콜 같고, 왠지 보리텐 같은 그 황갈색 액체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덮어두었던 호기심이 강한 충동으로 일렁였다.
"나도 한번 마셔보면 안돼?"
기분파답게 기분이 좋을 때면 몹시 관대해지는 아버지가 흔쾌히 내어준 맥주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쯤 들이켰을 때였다. 묘한 화끈거림이 동구를 감싸는가 싶더니 별안간 동구가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벌렁거림이라기엔 너무 미약한 팽창과 수축, 차라리 간지러움에 가까운 그 감각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뭐지? 이게 취기라는 건가? 취기가 원래 동구를 타고 올라오나?
이후로도 술을 얻어마실 기회는 많았다. 우리집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고기를 구워 먹었고, 고기를 구우면 열에 여섯은 맥주를 깠으니까. 서너 번의 음주 후, 나는 확신했다. 뭐라 형언하기 힘든 이 감각은 우연도 아니고, 일시적인 것도 아니다. 이건 나의 체질이구나. 어쩌면 집안 내력일지도 몰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있잖아...다른 사람들도 술을 마시면 동구가 웃어?"
"뭐어? 닌 술을 마시면 동구가 웃냐?"
"응. 처음엔 히히히 웃다가, 무시하고 계속 마시면 푸하하하하하하 웃어."
"푸하하하하하하! 별 소릴 다 듣겠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동구의 폭소를 한낱 웃음거리로 넘기지 않았을텐데. 그건 동구의 폭소가 아닌 동구의 호소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동구의 이상반응 때문에 술맛을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고, 그렇게 술맛을 모른 채 성년이 되었다. 그리하여 술을 멀리하던 20대 초반까지 동구의 호소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다시 동구가 존재감을 피력하기 시작한 건 첫째 출산 후 1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변기에 앉았는데 피가 뚝 뚝 뚝 뚝 떨어지더니, 밤새 작열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쩌면 불면의 진짜 원인은 작열감보다 공포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 들어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고 했던가. (그렇게 쓰는 거 아니다) 나왔던 동구가 들어가고 나면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하루 이틀 사이에 출혈도 잡혔다.
그후로도 1년에 최소 서너 번은 화장실에서 피를 봤지만, 그러려니 했다. 동구의 출혈이 코피보다 대수롭지 않은 연례행사가 되었을 즈음, 나홀로 미국여행을 떠날 기회가 생겼다. 아이들까지 떼어놓고 훨훨 날아간 미국에서 나는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재기발랄한 사람이었다. 요근래 내 인생이 이렇게까지 반짝반짝 빛났던 적이 있었던가. 모든 것이 좋았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들이 좋았다. 단 하나, 동구만 빼고.
그동안은 장기 외박을 한 적이 없어 몰랐다. 배변 후엔 도무지 집에 들어갈 생각을 않는 우리 '똥꾸'러기를 항상 따뜻한 물로 살살 달래 들여보내야 했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어디서나 온수가 나오고 샤워 시설에 부족함이 없는 나라다. 그 당연한 일상이 미국에서도 가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국에서 첫 배변을 마치고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미국 샤워실엔 샤워기 호스가 없었다! "아뿔싸!"라는 말을 현실에서도 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정수리부터 적셔주는 해바라기형 샤워기나 욕조에 붙어있는 일체형 수도꼭지로는 성난 동구를 달랠 수 없었다.
열흘 동안 동구와 함께 미국구경을 하며, 나는 깨달았다. 내 동구는 망했구나.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동구로구나. 여태 이 동구로 살 수 있었던 건, 내가 바깥활동이 거의 없는 집순이라 가능했던 일이구나. 지금 전쟁이라도 나면, 그래서 수도가 파열되면, 난 꼼짝없이 동구를 부여잡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겠구나. 옆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남편은 얼마나 괴로워할 것인가. (그렇다, 난 N이다. 그것도 신파적인 망상에 목숨거는 파워 NF다.)
고로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가장 반가웠던 건, 남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니고 샤워기 호스였다. 한국식 샤워 시설의 은혜를 힘입어 망가진 동구로 5년쯤 더 연명하다가, 마침내 동구가 수명을 다했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동구의 일탈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일주일을 누워 지냈지만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대도시의 항외과를 찾았다. 웬만해선 반경 10키로 이내를 벗어나지 않는 지역사회형 인간이 대도시로 진출할 때는 대개 비장한 이유가 있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치. 질. 수. 술.
만약 의사가 "여태 어떻게 버텼어요? 당장이라도 수술해야 됩니다."라고 한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수술대에 오를 것이다. 터질 듯 작열하는 동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마치 폭탄을 품은 독립투사처럼 몸에 힘을 주고 비장한 각오를 다질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선이언니였다.
"날필아, 혹시 다음달부터 작업 하나 해줄 수 있니?"
"언니, 제가 지금 병원 가는 중인데 오늘 당장 수술을 받게 될지도 몰라서요."
"수술? 무슨 수술? 어디가 아프니?"
"언니, 별 일 아니에요. 지하철이라서 톡으로 말씀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톡을 보냈다.
언니가 친 무수히 많은 ㅎ가, 그 갯수만큼 내 가슴을 연타했다.
큰일났다.
이번 뒤끝은 적어도 한 달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