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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ul 03. 2023

동구력과 지구력은 비례한다

뒷심은 뒤에서 나온다는 사실

열심히 살고 싶었다.

비록 내다버리는 시간이 하루의 절반 이상이지만.

열심히 살고 싶은 열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언제나 항상성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 집 뒤의 산을 매일 오르면 올랐지 전국의 명산을 정복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 사람. 그런 나의 성향을 일찍이 깨우쳤기에, 성인이 된 후 나의 최대목표는 항상성을 유지해도 좋을 만큼 건실한 루틴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학창 시절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시험 기간과 수시로 주어지는 과제들이 나를 강제근면으로 이끌었지만, 소속된 기관이 없는 지금은 다르다. 나를 채찍질하고 관리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러나 비장한 마음가짐과 별개로 나는 꾸준히 게을러왔다.


게으른 나 자신이, 쓸모 없이 흘려보낸 하루하루가, 부끄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부끄러운 나'를 혐오하는 마음과 그래도 '안쓰러운 나'를 옹호하는 마음이 부딪치면, 늘 후자가 이겼다. 부끄러움은 반복되어 뻔뻔함이 되고, 뻔뻔함은 굳어져 당당함이 되었다. 내가 낸데, 내 시간 내가 한심하게 쓰겠다는데, 누가 뭐래.


아이가 커갈수록, 여유가 생길수록 한심함은 정점을 찍었다. 커뮤니티 잡썰과 유투브 동영상, 각종 웹툰까지 두루 섭렵하며 <몰라도 사는 데 지장 하나 없을 정보>들을 머릿속에 욱여넣는 일상을 반복했다. 정보과잉으로 더부룩함을 느끼며 잠드는 새벽이 몇 달째 반복되자 나는 그만 죽고 싶어졌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갈망하는, 처절한 절망감 같은 게 아니다. 이렇게 살 바엔 그만 살고 싶다는 허무감.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력감. 나의 일상에서 내가 점점 사라져가는 소멸감.

나를 감싸는 여타 부정적인 감정들로부터 벗어날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나를 스쳐간 무수한 다짐들이 있다. 

애들 앞에서 유투브나 보면 에미도 아니지 → 응애

내가 또 웹툰을 보면 개딸년이다 → 멍멍

에미의 의무를 저버리고 정신없이 시청각 자극에 빠져들었던 기억, 사람이길 포기하고 기꺼이 감각의 개가 되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마침내 모든 자극이 사라지면 무뎌졌던 수치심이 되살아났다. 마취됐던 뇌가 서서히 깨어나는 그 순간이 끔찍하게 싫다. 마음의 괴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다시 시청각 자극에 뇌를 절인다. 한 방송사의 슬로건처럼 정말로, 즐거움엔 끝이 없다.


즐거움엔 끝이 없지만, 즐거움만 누린 사람의 끝엔 아무것도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무한한 향락이 마냥 즐겁지만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나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데 나의 욕구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이번엔 강수를 두었다. 남편의 스마트폰에 구글 패밀리링크를 설치한 뒤, 내 스마트폰을 자녀 기기로 등록해 사용시간 제한을 걸었다. 스마트폰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통제를 자청한 것이다. 스스로는 부끄러움을 못 느껴도 남편 앞에서는 느낄 것 아닌가.

'이래놓고 추접스럽게 비밀번호까지 풀어가면서 스마트폰을 쓰겠어?'

...그렇게 추저분함의 끝을 보았고, 남편과는 더욱 거리낌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도 한 보름 정도는 제한시간을 지켰으니 '나와의 약속'같은 흐리멍덩한 것보다는 '타인의 통제'가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벌금을 걸어보기도 했다.

플랭크 1분 이상, 3회 실행. 실패 시, 친구와의 공금계좌에 1만원 송금.

체력이 떨어지면 의욕도 떨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건실한 삶을 위해서는 건강한 육체라는 조건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뭣보다 전에 없던 허리 통증을 느낀 후, 플랭크의 필요성을 느꼈다. 필요를 느낀다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벌금 앞에 장사 없다. 자려고 누웠다가도, 돈 낼 생각에 눈이 번쩍 번쩍 떠졌다.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입에서는 욕지기가 나와도 기어이 1분씩 세 번을 채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돈이 세긴 세다.


벌금만큼 강력하진 않았지만 상금도 꽤 동기부여가 됐다. 

매일 청소하기. 성공 시, 1만원 적립. 한 달에 20일 이상 달성하면 30만원 획득.

가정주부가 청소 좀 했다고 상금을 받는 게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바로잡고 싶다. 모든 주부가 살림 9단은 아니어도 한 5단쯤은 될 거라고, 멋대로 짐작하지 말아달라. 살림을 잘 해서 살림을 하는 게 아니다. 손이 느린 자에게 살림은 매 순간순간이 고역이지만, 배가 고프니 하릴없이 밥을 짓고 옷이 없으니 속절없이 빨래를 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청소만큼은 미루면 한정없이 미룰 수가 있기에 우리집은 대체로 더러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더러움은 불편하지만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으며, 귀찮음을 참는 것보다 더러움을 참는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다만 물건이 뒹구는 집에서는 사람도 뒹굴고 싶게 마련, 방탕의 굴레에 빠질 확률이 높아진다. 집이 깨끗하면 모든 시작이 수월해질 것이고, 그럼 좀 더 건실한 하루에 가까워지겠지. 그래서 매일 청소하기를 목표로 정하고, 보상을 걸어둔 것이다.


과연 그랬다. 집이 깨끗하니 의욕이 넘쳤다. 오전 중에 집 청소를 마치면 그대로 도서관까지 걸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상이 몇 번 반복됐다. 늘 미루기만 했던 욕실 청소, 옷장 정리, 냉장고 정리까지 손을 뻗으며 도장깨기처럼 살림에 속도를 붙여가던 그 때, 동구가 신호를 보냈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

동구가 만약 사람이라면 아마 이런 식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을 것이다


아뿔사, 동기부여에 힘쓰느라 동구보호에 소홀했다. 피나는 노력을 원했지만, 그 피가 동구에서 나는 건 원치 않았다. 열정을 불태우고 싶었을 뿐인데 동구가 불타서야 되겠는가. 그래도 이왕 열정에 불을 지폈는데, 여기서 멈출 순 없다. 그런 말도 있잖은가.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징징대는 동구를 달래가며 건전한 루틴을 강행했다. 까꿍. 앉으나 서나 동구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극 I성향의 동구, 평생 세상구경이라고는 욕심내지 않던 동구가 별안간 외향형 동구가 되어 온종일 바깥으로 나돌았다.


중요한 건 마음 따위가 아니다. 중요한 건, 찢기지 않는 동구다. 찢긴 동구 앞에서 대쪽같은 마음 같은 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마음을 꺾고 드러눕기를 택했다. 게을러 터지거나 동구가 터지거나 무언가 하나는 터져야 한다면 몸이 편한 쪽을 고르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좋은 루틴을 만드는 데는 석 달이 걸리는데, 거지 같은 루틴으로 되돌아가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했다. 어느 새 나는 아픈 동구를 핑계로 팔자좋게 누워 아이들이 보든 말든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잠깐잠깐 찾아오는 현타. 나의 의지는 왜 이리도 실낱같으며 나의 육신은 왜 이렇게까지 나약한가. 쓸모없는 몸뚱이를 찢어발기고 싶다. 아 이미 찢어져 있구나.


가만 생각하면 늘 그랬다. 내 노력은 어딘가 어정쩡했다. 성실한 사람처럼 보이는 데는 도가 텄지만, 꾸준히 성실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랜 세월 적재된 근면성실의 부재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적인데, 동구까지 게으를 명분을 제공하니 오호통재라!




정말 열심히 살고 싶었다.

열심을 지속할 뒷심이 없었을 뿐. 

나의 부족한 뒷심은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빈약한 동구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니 중학교 시절의 기억에 가서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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