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필 Jun 15. 2023

누가 웃음소리를 내었는가

나는 치질이니라

동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렵다.

나의 오랜 친구, 치질을 고백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갈래로 나뉜다.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필요 이상으로 웃거나, "아............................." 필요 이상으로 숙연해지거나.


치질 환자로서의 소회를 밝히자면, 어느 쪽도 유쾌하지 않다. 그래도 굳이 좀 더 상처가 되는 쪽을 따지자면 필요 이상으로 웃는 반응을 맞닥뜨렸을 때다. 하다 못해 감기 몸살에도 "에구 어쩌니...잘 챙겨먹고 푹 쉬어."라는 인사치레가 기본인데 그보다 훨씬 고질적이고 절망적이며 직관적인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에게 진심어린 위로 한 마디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 아니, 진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형식적인 위로라도, 안쓰러운 척이라도, 좀 하란 말이다. 항문이 쪼개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 앞에서, 적어도 쪼개지는 말아달라 이 말이다.


이게 다 미디어 때문이다. 미디어 속에서 치질은 오랜 세월 조롱의 대상으로 소비되어 왔다. 단지 병이 발생한 부위가 다소 은밀하며 단정치 못한 것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만으로, 치질의 고통을 얕잡아보거나 치질을 앓는 이를 희화화하기 일쑤였다.


누군가는 <4기 치질환자로 10여년을 살다가 결국 치질 수술을 감행한 자>의 지나친 피해의식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살면서 누구보다 많은 <반문>과 <이의>를 제기했던 사람으로서, 나는 언제나 타인의 태클에 성심성의껏 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조목조목 따져보자.


전국의 초등학생들에게 대학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심어준 인기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1998)>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등장한다.

동엽(신동엽)은 치질 때문에 고생하다 수술을 결심하지만 여자친구 희진(우희진)이 알까봐 거짓말을 하고 병원에 간다. 무사히 수술을 마친 동엽은 병원에서 경인(홍경인)과 산책을 하다 연수를 간다던 교수님(이경실)과 마주치는데...
진짜 거기가 아프면 이런 자세를 취할 수 없다


의병제대로 군에서 돌아온 동엽이 차마 병명을 밝히지 못해 허리를 다쳤다고 둘러대던 장면, 이에 허리 마사지를 해주겠다며 엉덩이 위에 걸터앉은 친구 때문에 기절하던 장면, 좌욕 중에 친구가 화장실에 들어오자 깜짝 놀라 좌욕기에 머리를 감던 장면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 모든 장면에 필수로 곁들여지던 야유와 웃음소리 효과음도 물론.


어디 그뿐인가. 90년대 후반 청순가련 여배우의 대표격 명세빈-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린 드라마 제목 역시 <순수>였다-의 연기 변신으로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2004)>에서도 치질은 강력한 웃음코드로 초반 시청률을 견인했다.

우울한 나날에 건강도 나빠져 안 아픈 데가 없고 치질까지 생긴 보도국 기자 신영(명세빈). 이때 초등학교 시절 자신에게 청혼을 했던 어린시절 첫사랑 신준호(유준상)가 미국에서 의사가 돼 귀국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희망이 샘솟는다. 치질이 심해져 병원을 찾는데 자신의 엉덩이 중앙 부위에 수술장갑 낀 손을 푹 찔러넣는 사람이 알고 보니 신준호!
이를 악물면 악물었지, 입이 저만큼 벌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림처럼 단아하게 미소짓던 명세빈이, 2000년대에 들어서 콧구멍을 저만큼 키울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냐 했으랴. 작정하고 망가지는 명세빈의 연기로 큰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였던 만큼 수많은 명장면이 탄생했지만, 단연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항문외과 에피소드였다. 아니, 사실 그 장면밖에 기억이 안 난다.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던 개그맨부터 연기 변신을 꿈꾸던 청순가련 여배우까지, 치질 덕을 봤다. 그러나 치질은, 전국의 치질 환자들은 조금도 덕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미디어가 치질환자에 덧입힌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인해 (안 그래도 외상 땜에 서러운 마당에)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치질은 이용당했다. 그렇다면 내가, 이 <4기 치질환자로 10여년을 살다가 결국 치질 수술을 감행한 자>가 더 철저하게, 처절하게 치질을 이용해주겠다.


그렇게 치질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밝을 수 없었던 첫번째 에세이 <특기는 사과, 취미는 반성입니다>를 출간한 후, 두번째 에세이는 반드시 유쾌하게 가겠다고 마음먹었더랬다. 그러나 시작할 때의 각오와 달리 자꾸만 글이 비장해져서 당혹스럽다. 그만큼 치질환자로 살면서 받은 고통과 설움이 알게 모르게 많았겠거니, 너그러이 이해해주면 좋겠다. 외람되지만 한마디 덧붙이자면, 혹시 주변인이 치질을 고백해 오거들랑 할 수 있는 한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형식적인 위로의 말이나마 건네주기를 당부한다. 만일 당신이 평생 건강한 동구로 원활한 배변활동을 누려온 덕에 그 고통에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면, 적어도 웃지는 말아달라.


그러나, 나의 치질투병기를 읽으면서는 맘껏 웃어도 좋다. 그래봤자 내가 더 크게 웃을 거니까.


독자야.

아무리 웃어봐라.

내가 절필하나.

더 신나서 쓰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