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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우 Feb 12. 2024

숨 참고 일상 다이브

ADHD가 되던 날 







시작은 텀블러였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 텀블러를 씻어서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신다. 그런 다음 신명태명조와 HY견고딕이 가득한 한컴오피스의 세계로 풍덩 뛰어든다. 6월의 어느 날 아침에 자리에 앉아 스탠리 텀블러를 노려봤다.


머릿속에서 텀블러를 씻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재생했다.


의자에 앉아 몸을 살짝 서랍 쪽으로 돌린다. 두 번째 서랍에서 친환경 건식 수세미(옥수수로 만들어져 물만 칠하면 거품이 난다)를 꺼낸다. 텀블러와 수세미를 손에 쥔다. 자리에서 일어 난다. 자동문 버튼을 누른다. 문을 나가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번 꺾어서 곧게 걷는다. 엘리베이터 홀을 지나 왼쪽에 있는 여자 화장실문을 연다. 핸드타월을 뽑는다. 핸드타월을 세면대 위에 깔고 텀블러와 수세미를 올려둔다. 물을 튼다. 손을 적시고, 핸드워시를 묻혀 손을 비비고 닦아낸다. 수세미를 물에 흠뻑 적신다. 거품을 내어 텀블러 입구를 닦고, 손을 쑥 넣어 내부를 닦아낸다. 스탠리 로고가 있는 겉면도 닦아낸다. 물을 튼다. 수세미를 버린다. 텀블러의 안과 밖을 미지근한 물로 천천히 헹궈낸다. 남은 거품이 없는지 확인한다. 핸드타월로 겉면에 뭍은 물기를 닦아 낸다. 화장실 문을 연다.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꺾어서 사무실 문 앞에 선다. 지문을 인식시킨다. ‘문이 열렸습니다’ 라는 음성과 함께 자동문이 열린다. 문을 하나 더 열고 오른쪽에 있는 정수기에서 텀블러를 올린다. 온수 버튼 한 번, 냉수 버튼 한 번을 눌러 따뜻한 물을 담는다. 왼쪽 벽의 시계를 흘끗 보고 내 자리로 돌아온다. 의자에 앉아 ‘한컴 오피스’ 아이콘을 두 번 클릭한다. ‘최근 파일’에서 어제 날짜에 ‘_수정중.hwp’라고 붙은 파일을 누르고 열리는 동안 따뜻한 물을 천천히 삼킨다.

허공을 부유하는 카메라의 시점으로 텀블러를 씻는 나를 몇 번이고 재생했다. 시간은 나를 똑딱똑딱 쪼개고 지나갔다. 의식이 모래시계처럼 흩어졌다 모였다. 윈도우 상태표시줄 아래 시간은 09:33 에서 10:58, 11:23 으로 변한다. 아침에 출근하며 가방을 집어 던지고 앉은 자세 그대로, 상상 속의 나는 텀블러를 쉰네번쯤 씻었다. 목이 탔다. 공연히 인터넷 브라우저에서 그룹웨어 사이트만 열었다 닫았다 한다. 따뜻한 물 한 모금만 마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우스를 누르는 왼쪽 집게 속은 점점 뻣뻣해졌다.


내가 도무지 부팅이 되지 않았다. 텀블러를 세척하는 과정을 그리는 나의 정신과 실제로 그 것을 수행해야하는 나의 육체가 자꾸 접속에 실패했다. 전파가 잘 터지지 않는 오지에 있는 것처럼 마음은 자꾸 내 몸과 끊어졌다.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안동찜닭을 먹으러 상암동 길거리를 나선 내 마음은 로켓 발사에 실패한 우주연구원처럼 참담했다. 


 그렇게 6월의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오전이 흘러갔다. 3분이면 끝날 설거지의 과정을 생각하느라 3시간이 지나갔다. 초침과 분침이 지나며 떨어진 먼지가 얇게 나를 뒤덮었다. 산 채로 녹슬어가는 기분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데 그 단계가 너무 많아서 생각만으로 지쳐버렸다. 물을 마시면 어떻게든 시작할 수 있을 걸 안다. 근데 그걸 그냥 하는 게 잘 안되었다. 단계가 아주 세분화 되어있고 매 단계를 의식한다. 의식은 무의식이 들어올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수행평가 제출 전 날 새벽에 텅 빈 A4 용지를 시뻘건 눈으로 노려보던 열다섯 살의 나, 시험 범위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걸 도무지 할 수 없어서 펜을 세게 움켜쥐고서 암모나이트처럼 몸을 웅크리고 울던 열아홉 살의 나. 할 수 있는데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때문에 아무리 닻을 내려도 현실에 단단하게 발을 내릴 수 없었다. 가라앉는데 바닥이 없어서 얼마나 내려가야 할지 혹은 다시 올라가야 할지 알 수 없는 검은 물 속에 내던져졌다. 마냥 미루지도 시작하지도 못한다.


다음 날, 다니던 정신과에 가서 해피마인드 종합주의력 검사를 받았다. 해피마인드는 퍽 유쾌한 이름을 한  ADHD 검사다. 검사를 받고 싶다고 했을 때, 2년 간 나를 담당해 준 선생님은 ‘유정 씨가 ADHD일 리가 없는데….’ 라고 고개를 갸웃했다. 한 시간 동안 각종 테스트를 거친 나의 검사지에 선명한 ‘경계’ ‘저하’라는 글자를 보고는 ‘약 먹읍시다.’라고 했다. 나의 경우엔 주의력을 지속하고, 여러 자극을 동시에 처리하는 능력, 자극을 순서대로 처리하고 기억하는 능력에서 문제가 나타났다.


‘와, 난 ADHD야!’ 하고 막상 개운한 기분이었다. ‘목에 혹이 있는데 뭔지 검사가 해보세요’ 보다는 ‘우측 갑상선 악성 신생물’이라고 적힌 진단서를 받아서 들었을 때의 후련함처럼. 반짝이 가루처럼 흩어지는 주의력을 붙잡고, 의식과 나 사이의 닻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는 약이 유니작과 함께 추가 되었다. 출근하자 마자 하얗고 통통한 콘서타 36mg과 파랗고 앙증맞은 유니작 3알을 털어 넣는다. 천천히 의식의 줄기가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하고자 하는 나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연결되기를.


닻이 바닥에 통, 닿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가 시작된다. 용기의 약이 전두엽에 도킹하면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자, 숨 참고 일상으로 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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