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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우 Mar 25. 2024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사람의 몸이 만드는 유려하고 아름다운 선에 대해서 






“넌 다리가 불필요하게 예뻐.”


싱크대에 서서 브리타 정수기로 물을 따르고 있는 남자친구를 보며 불평했다. 까만 드로즈 아래로 경부고속도로 마냥 쭉 뻗은 긴 다리와 작은 골반, 여자였으면 손바닥 만한 미니스커트를 입는 재미가 있었을 테다. 정작 그는 배기진을 즐겨 입으며 각선미를 낭비하는 중이다.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몸을 좋아한다. 목과 팔다리가 길고 얼굴이 작은, 골격이 도드라져서 얼굴부터 온 몸에 세심한 명암이 드리우는 몸. 그런 인간의 몸이 만들어 내는 유려한 선이 좋다. 그 선을 완성하는 건 다리다.

사람의 몸이 만드는 선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내가 160cm의 작은 키에 비해 수상하게 큰 손과 긴 팔다리를 가진 탓이다. 무릎까지 닿는 긴 팔과 팔손이 이파리 같은 손은 아직도 자라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나보다 한참 키가 큰 남자와 손을 잡았는데, 그의 손을 와락 덮어버린 채 머쓱해하는 내 손과 어쩐지 모자란 그의 팔길이에 맞추느라 링거 맞는 사람처럼 어정쩡하게 들고 다녔던 팔은 조용히 항의하곤 했다.


‘아, 선이 길고 예쁜 사람이 좋겠어.’


사람의 몸만이 만드는 부드러움과 안정감이 있다. 골격이 예쁘고 길쭉한 남자친구의 몸이 그리는 선과 섬세한 음영을 찬찬히 보는 걸 좋아한다.


불거진 눈썹뼈 위로 아치를 만들고 있는 눈썹도 아름다운 선을 그린다. 최근에 그의 눈썹을 다듬어 주었다. 왁싱 스트립을 뜯을 때마다 그는 왁왁, 오리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 모든 환난이 끝난 후엔 눈썹을 들썩들썩 하며 마음에 들어 했다. 눈썹 뼈 위로 날갯짓하는는 갈매기 같은 눈썹. 그래, 남자는 눈썹이지.


쌍꺼풀 없이 깊이 들어간 눈은 아주 어린애 같다가, 아주 노인 같다가 그렇다. 어둠의 한석규를 닮은 그는 대략 5세부터 100세 같다. 나는 한참 그를 올려다보아야 하는데, 덕분에 그의 속눈썹이 드리우는 슬프고 명민한 그늘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수염이 까슬하게 올라온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으면 안전한 기분이 든다. 그가 나를 번쩍 안아 올리면 한참 다리가 공중에 붕붕 뜨는 일시적 무중력상태가 된다. 때로 비 오는 날의 어린 짐승처럼 보호받고 싶은 나는 그런 무력감이 싫지 않다.


보드랍고 연약한 긴 목, 다부진 어깨와 팔이 이어지는 기다란 곡선, 예쁜 다리가 성큼성큼 걸을 때 만드는 포물선. 그의 예쁜 골격과 긴 팔다리가 만들어내는 유려한 선이 아름답다. 긴 팔다리를 가진 사람은 옷을 입고 있으면 더 많은 상상력을 자극해 어쩐지 관능적이다. 난 그만 음흉한 아저씨가 되어 그의 몸이 만드는 선, 그 선을 따라 흐르는 이야기들을 되새겨본다.


“이번 주는 네 다리에 대한 글을 쓸 거야.”라고 말하자 그는 인삼처럼 요염하게 다리를 꼬았다. 주방에 서서 커피를 내리는 그 애의 예쁜 다리를 오래오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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