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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pr 12. 2023

고양이의 침실

내 방을 가져도 좋아!

고양이 우주는 집에 온 이후 첫 사흘(3일, 요거 논쟁이 있으시다고들 하셔서)은 이동장과 자기 방에서 잤지만 그다음부터는 놀랍게도 누나 침대에 올라가서 잤다. 하루뿐일 줄 알았는데 불이 꺼지고 다들 잠이 들 시간이면 누나 방으로 들어가서 미야, 미야, 그러는 거다. 아직까지 침대에 올라가지 못하니까 올려달라는 거겠지. 이 반응에 신난 딸은 침대로 기어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 형태의 스크래처를 사다 놨다.


이걸 붙들고 기어 올라는 갔지만 내려오지 못하는 우주, 할머니는 새벽에 우주가 화장실 못 가고 참고 있는 거 같아서 여섯 시에 손녀 방에 들어가 우주를 꺼내 거실에 내려놓는다. 그러면 우주는 뒤뚱뒤뚱 여유롭게 급식기로 걸어가 사료를 먹고, 그 옆에 물을 마시고, 화장실까지 가서 일을 본 후 자기 장난감 근처에 앉아 있다. “이제 내가 시간이 됐으니 어서 너희들이 와서 나를 데리고 놀아줘라.”라는 듯이 말이다.


이걸 내가 몹시 부러워 한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침대가 없고 매트리스를 깔고 자는데 올라오기도 쉽고, 게다가 전기장판으로 뜨뜻하게 데워 놓았고 항상 문도 열어두니 들락날락 거리기도 좋은데 대체 왜 내 방은 안 오는 걸까? 데려다 놔도 금세 튀어나가고 말이지.


이런 나를 하도 불쌍히 여긴 딸아이는 무슨 페로몬 같은 걸 사 왔다. 이걸 뿌려 놓으면 고양이 거부감이 줄어든다는 거다. 아, 그럼 아빠 방에 와서도 도망가지 않을 거란 말이야? 오, 기대되는군… 은 개뿔, 여전히 데려다 놓으면 뒤도 안 보고 달아난다.


그런데, 어제는 기적이 일어났다. 우주가 아내를 따라 내 방으로 들어왔다. 하도 우주가 안 놀아주고 무시(!)하니까 아내는 내가 불쌍해서 데리고 온 건데(흑흑) 이 녀석이 매트에 올라가 덜컥 주저 않는 게 아닌가. 물론 내가 혹시라도 몰라서 미리 전기장판을 켜 놔서 뜨뜻하긴 했다.


아내는 잠시 우주랑 놀아주다가 아빠랑 놀아, 하면서 나갔는데 어랏, 따라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것 아닌가! 문을 확 닫아 버리고 못 나가게 할까 그러다가, 내가 내 딸도 그렇게 안 키웠는데 우주의 자율권을 침해하면 안 되겠다 싶어 평소처럼 문을 연 채로 매트에 누웠다.


우주는 잠시 나를 돌아보며 “이제 왔냐?”하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우주를 쓰다듬었다. 골골 송이 시작됐고 어느 순간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 우주가 일어나서 거실로 나가는 걸 봤다. 그럼 그렇지, 아이고 나는 잘란다.


새벽 6시 누가 뒤에서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 들어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우주가 내 등과 벽 사이에 몸을 말고 자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잠이 막 깬 어리벙벙한 상태에서도 일단 폰을 찾아 사진을 찍고(참내 기록 본응이냐 뭐냐) 우주의 등을 쓰다듬으려 속으로 아이고 좋아라 하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 잠시 후 할머니가 우주를 데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나는 여느 때처럼 7시 20분 알람을 듣고 깨어났다.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새벽 여섯시, 내 매트에서 잠든 우주

우주 어딨어?라고 후다닥 나갔더니 거실에서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고 있더라. 잠시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지. “아빠, 굿모닝?” 등을 쓰다듬고 얼굴을 만지다 보니 금세 십여분이 지나갔다. 딸아이는 아침에 약간 삐져 있는 것 같았다.


PS> 페로몬은… 효과가 없는 걸로. 우주는 기절방석이라고 부르는 쿠션을 두 개나 갖고 있는데 거기에 올려놓으면 부리나케 도망갑니다. 이틀 때 뿌려놨는데도 도망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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