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된 나를 대면하기 위해 치른 장례식
어제 퇴고를 마치고 초안을 정리하며 쓸모없어진 문장들을 폐기했다. 첫 리라이팅 때 느꼈던 것이 인지능력에 대한 충격이었다면, 이번에 마주한 것은 낯선 슬픔이었다. 그 시절의 원고 속에는 꿈과 희망, 만화적 환상을 이야기하는 소녀의 감성이 살아 있었다.
이제 내 안에는 본질만 남고 나머지는 다 타버렸다. 구조와 현실만을 논하는 서늘한 사람이 되어버린 지금, 그때의 내가 그리우면서도 결코 돌아갈 수 없음을 안다. 그 자각이 기이하게 서글펐다.
꿈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다만 나는 이제 꿈에 대해서도 깊게 사유하지 않는다. 소름 끼칠 정도로 투명한 자기직시와 현실 인식, 그리고 이것을 해야만 한다는 감각만이 나를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태어난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는 소명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길이 확신을 주지는 않지만,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실체를 확인할 때까지는 멈출 수 없다.
그렇게 현재의 원고에 써먹을 수 없는 지난 원고들을 버리면서 과거의 나를 장례 치러주었다. 호캉스 같은 걸 좋아했던, 가짜 안식이 필요했던 나. 마블 영화같은 걸 소비하면서 위로받았던 나. 그녀는 내 안에서 죽고 이제는 진짜 해방이 아니면 무엇도 필요치 않은, 지독하게 선명한 나만이 남았다. 이것은 상실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탈피가 주는 낯선 통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