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7시 55분
접이식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아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을 네 페이지 읽는 와중에 나는 의자 등받이를 오른 팔걸이로 쓰고자 몸을 우측으로 90도 틀어 앉았다. '나도 모르게 편안함'에 취해 약간의 미소를 지었다. 부엌(꽉 막힌, 집기로 벽을 가득 메운)을 배경 삼았다가 사람들, 모양과 크기가 제각기 다른 차들의 움직임이 보이는 그리고 어슴푸레한 저녁 무렵 새들이 법석을 떨며 날아가는 움직임이 보이는 유리창으로부터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편안함'은 몇 가지 낱말을 줄지어 놓았더니 사실 이미 알고 있던 편안함이라는 즉, 습관이었음을 알아차리었다. 공간이라는 것은 이러한 습관에 의해 돌고 돌다 원래의 자리로 정착한 뒤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예를 들어, 잿빛으로 물든 높다란 건물 사이를 거닐고 이윽고 치임을 느낀 뒤 한적한 내 고향 기차역에 곧 다다른다는 열차 안내 방송으로부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 지방 사람의 특수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몇 분이 지났을까. 불현듯 뻐근해진 오른팔을 내려놓기 위해 몸을 좌측으로 틀기 시작하는 틈을 비집고 레코드가 끝이 났음을 내게 알린다. 아트 파머의 플루겔혼 연주는 녘새발 소리로 착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줌을 알기에 그의 <Art> 앨범을 턴테이블 위에 살포시 얹었다. 타닥타닥. 숨이 멎을 것만 같아,라고 속으로 내뱉는 순간 빠라바라밤. 그의 재즈가 흐르면서 유리창은 까맣게 물들었다.
습관적으로 접이식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아 카뮈의 글을 묵독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편안함'에 취해 약간의 졸음을 좇았다. 종이 울린다. 그녀가 들어온다. 난 고개를 쉽사리 들지 못한다. 여념 없는 투로 저녁 안부를 나는 묻는다. 졸리기 때문이다. 커피를 내린다. 한 방울이 줄기차게 이어진다. 남자가 들어온다. 나는 그녀가 주문한 저녁 커피를 내리느라 그를 향한 저녁 안부에 여념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편안함'에 취해 그들을 나와 같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와 같기에 안부를 묻지 않았고, 나와 같기에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으며, 나와 같기에 굳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오후 8시 15분
마주 보고 앉은 그녀와 그를 향한 커피 두 잔이 마침내 도착했다. 그들의 두 팔은 각자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도착한 커피 내음을 맡으며 향에 취하기 시작한다. 레코드가 끝이 났다. 적막이 흐른다. 그들은 다소곳하게 나의 레코드 뒤적이는 소리에 집중한다. 케니 도햄의 Lotus Flower. 그들은 재즈에 취하기 시작한다. 말이 없는 그들은 갑작스레 사람들이 몰려와 꽉 차버린 카페 분위기에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사람 파도 소리와 음악 소리가 그들의 입을 여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녀가 먼저 양 무릎에 놓인 두 손을 테이블 위로 옮기었다. 곧이어 그도 따라 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모든 행동을 말이다. 십여 분이 흘렀다. 사람들은 커피를 양손에 쥐어 들고 그들만 남긴 채 훌쩍 떠났다. 아주 잠깐일 뿐인 섬광의 틈새로 그녀의 침묵이 내 귓전을 울렸다. 남자는 애석하게도 따라 하지 못했다. 그는 재잘거림을 넘어섰다. 질주하기 시작한다. '그녀도 모르게 편안함'에 취해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손을 양쪽 무릎에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오후 8시 50분
그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남아 있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린다. 자연스레 카페에 숨겨진 화장실 열쇠를 향하여 몸을 일으킨다. 열쇠를 들고선 그녀도 모르게 약간의 미소를 짓는다. 열쇠에 걸려 있는 원숭이 인형이 귀엽기 때문이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이제는 책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멍을 때린다. 십여 분이 흘렀을까. 여념 없는 투로 내게 저녁 안부를 건네고 문을 열고 나간다. 종이 울린다. 난 여전히 고개를 쉽사리 들지 못하였다. 졸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