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물

by 희량

따끈따끈한 소식~ 어제 공연을 하고 왔다. 동아리 외부에서 요청한 공연은 오랜만이었다. 강남 한복판의 잘 빠진 건물에서, 유리창 너머 빌딩숲을 배경으로 국악을 연주했다.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 준비했고, 나는 학교에 재학 중이긴 하나 양심상 졸업생에 속한다. 유난히 특별한 공연은 아니었고… 공연 장소로 이동하는 사이에 조금 들떴다가, 공연 전에 긴장하고, 여러 번의 실수로 곡을 꾸며가며 성황리에 마친 흔한 전개였다. 여느 때처럼 공연은 이토록 피곤하고 괴롭고 산만한 일이라는 걸 76번째 깨달았고, 그걸 또 잊어버리고 공연하겠다고 나선 과거의 나를 원망했으나, 또 금방 잊고 공연하겠다고 들뜰 미래의 나를 예견한 하루였다. 항상 그랬듯이.


그러나 두 가지의 색다른 경험이 있었다.


1. 문득 소속감이 나한테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깨달았다. 공연 시작 전, 악기를 트럭에서 옮겨 건물 뒤편에 잔뜩 쌓아두고 언제 어디로 어떻게 옮길지 의논하던 중이었다. 나는 화장실을 가야겠다며 건물 안으로 쏙 들어왔다. 공연 장소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이곳은 전자제품 스토어로… 친절한 인사와 환영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난 평소 적극적인 판매 공간에서는 주눅 드는 소비자인데, 이날만큼은 당당하게 사람들 사이를 뚫고 다녔다. 화장실 위치까지 물어봐가며 야무지게 다녀왔다. 문득, 나의 당당한 태도가 매우 뿌듯했다. 내가 미친듯이 당당하면 저 사람들은 내가 고객인지, 본사에서 온 사람인지, 어떤 관계자인지 알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당당하고 볼 일이었다. 당당함은 10년 넘게 내 노트북 비밀번호를 구성할 정도로 내 인생을 통틀어 간절히 지향하는 가치인데, 늘 실패하고 마는 어려운 미덕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성공하고 말았다! 매우 뿌듯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건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였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내가 온전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집단은 단단한 자신감을 주었다. 허리를 더 꼿꼿이 세우고, 거리낌 없이 박장대소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이 되어준다. 내가 나로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는 집단이란, 내 자존감과 자신감의 결정적인 조건이었나보다. (물론 해금을 연주하는 순간만큼은 당당함을 송두리째 잃어버리지만…)


2. 전례 없는 특별한 뒤풀이를 가졌다. 뒤풀이는 공연의 꽃으로… 하루 온종일 기대한 순간이다. 1차는 중국집에서 여러 가지 요리를 풍요롭게 먹었다. 이후 나를 비롯한 고인 물(졸업생)들은 다음 단계를 의논했다. 동방(동아리방)가서 합주하자는 소리 누가 먼저 꺼냈지? 누군가는 또 농담을 진담으로 받았다(아마도 내가). 결국 우리는 공연 뒤풀이 2차를 위해 동방으로 향했다. 그것도 쏟아지는 비를 뚫고. 어떡해, 우리 아직 청춘인가봐… 이 지독한 사람들은 그동안 못 해온 ‘목적 없는 합주’를 실컷 했다. 근데 정말 웃긴 사실이지만, 나 진짜 행복했다. 우리는 졸업한 이후엔 오랫동안 공연이라는 목적을 위해 합주를 해왔고, 이렇게 오로지 재미만을 위한 합주는 학교 다니던 시절 공강시간에 하릴 없이 누워있던 사람들이 주섬주섬 일어나 자연스럽게 시작하던 놀이였다. 즐기기 위한 합주. 다같이 함께 음을 내는 것에 집중한 합주.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이 시간만큼은 그 어떤 실수도 상관 없었다. 심지어 술도 마셨다. 이 광란의 합주를 어떻게 거절해. 음주보다 매력적이야. 우리 엄마는 뒤풀이 2차로 동방 가서 합주했다니까 “미친 것들”이라고 해줬다. 또 박장대소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한 5년 전인가, 이 미친 졸업생들이 모인 톡방 이름을 “애정하는 고인물”이라고 적어뒀다. 같은 것에 돌아있는(?) 사람들과의 소속감은 날 애정 넘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감 넘치고 유쾌한 사람으로도 만들어주고. 한창 때 합주하고 놀던 사람들이랑 늙어가면서도 합주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지금 우리를 결집시키고 이끌어나가고 있는 어르신 두 분이 오래오래 건강하고 정정하셔서 우리 평생 합주할 수 있길 바란다. 물론, 각자 삶의 방향대로 흐르면서 또 다시 와해와 재결성을 넘나들 수도 있겠지. 그러니 지금 열심히 즐겨둘 테다. 비록 오늘 또 내가 해야 할 일(논문)을 미뤘더라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