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인턴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회사라는 세상을 만났고, 난 매일 두려움에 떨었다. 광활한 오피스에 울려퍼지는 키보드 소리도, 점심시간에 주고받는 농담도, 나에게 요청하는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서치 업무도… 죄다 무서웠다. 친구들한테 나만 이렇게 무서운 거냐고 우는 소리를 계속 꺼냈다. 무엇에 웃어도 되는지, 언제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아 그저 애매한 웃음만 흘려댔다고…
6시에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그곳은 인턴에게만큼은 칼퇴를 지켜주었다. 그래서 하루 8시간만 일했는데도 녹초가 되어 흐물흐물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러니하지. 3년차 때는 하루 10시간도 넘게 일하고 더 어렵고 더 많은 업무를 처리했는데, 퇴근 후 힘겨운 정도로 따지자면 인턴일 때가 더했던 것 같다. 여기선 인간의 적응력에 감탄해야 하나?
인턴 김희량은 처음 만난 각박한 사회에 놀란 가슴을 무언가로 달래주어야 했다. 한 마디로 힐링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다!다!다’였다. 내가 어린이집~초등학교를 다닐 때 방영되었던 애니메이션이다. 눈동자가 얼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여자 아이의 머리카락은 엉덩이까지 내려오며, 중학생 애기들이 외계인 애기를 키우겠다고 부부 코스프레하는 만화다. ‘다!다!다!’를 보면 하루종일 긴장으로 뭉쳐있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때 묻지 않은 깨끗한 세상에 잠시 머물다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다!다!’에서 악역이라고 여겼던 인물은 크리스인데, 다 크고 보니 크리스도 악역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크리스가 남자 주인공인 우주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엄청 경계하고 그랬었는데, 크리스는 친구들을 향한 호의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평소에는 섬세하고 우아하지만 화나면 매우 폭력적이고 괴력을 발휘하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그렇게 크리스랑 우주랑 예나랑 다른 친구들이랑 이런저런 문제를 같이 고심해서 해결하고, 다 끝내면 사이 좋게 세상 모르고 자는 이야기를 보다 보면 좁은 자취방이 평화로 온통 물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화순초등학교는 ‘만연산의 메아리’라는 제목의 문집을 발간했다. 만연산의 메아리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체 학급 사진들이 모두 실려있는데, 어린이집 마당에서 같이 뛰놀던 언니들을 찾는 재미가 있었다. 신기한 건 어른 김희량이 초등학교 4학년인 은진 언니를 보는데 너무 언니 같아보이는 거다. 열한 살의 얼굴인데도. 이건 너무 웃기는 경험이었다. 열 살 유리 언니, 열세 살 은지 언니 다 너무 언니 같아 보여서 어이가 없었다. 이 사진을 볼 때 나는 아홉 살로 돌아가나보지?
‘다!다!다!’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예나랑 우주랑 루다랑 바바를 보며 즐거워했던 어린이 김희량과, 크리스를 애정할 줄 알게 된 어른 김희량이 조우한 순간이다. 어린이 김희량이 내 안에 이렇게 잘 살아 있었다는 게 놀랍다. ‘다!다!다!’ 같은 애니메이션으로 언제든지 꺼낼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하루는 오랜만에 애니메이션 ‘너에게 닿기를’ 배경음악을 듣고 열심히 울었다. (아줌마 잘 울지…?) 그 잔잔하고 따뜻한 음악에 한껏 울음이 차올랐다. 눈물의 내용을 분석하면 대강 이렇다. ‘너에게 닿기를’에 나온 내용이 얼마나 순수했는지, 그걸 보며 행복해했던 나도 얼마나 순수했는지, 그리고 그 순수함을 누릴 수 있었던 게 얼마나 큰 호사였는지.
나는 행복을 만끽한 어린아이였다. 몇 가지의 얼룩들도 있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가진 게 많았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많다. 부당함에 노출되지도 않았고, 세상의 각박함을 몰라도 되는 아이다운 아이였다. 그게 당연한 게 아니란 것을 이제 겨우 조금 안다. 나를 키웠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어려웠던 일인지. 십대의 순수함을 그리워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의 바랜 행복을 더듬어가며 눈물 흘릴 수 있는 것도.
난 지금도 행복을 만끽하는 어른이다. 어린이 김희량과 어른 김희량, 그 둘이 행복하게 살아서 기쁘다. 그 연속적인 행복은 참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나는 얼마나 큰 복을 타고 난 걸까. 안도와 감사가 넘쳐서 어쩔 줄 모르겠다. 뭘 잘 했다고 이런 삶을 받았을까. 믿는 종교도 없는데, 내가 모르는 그 어떤 전지전능한, 세상의 어떤 법칙에 깊이 절하고 싶은 기분이다. 그러니 일상에 열심히 정성스럽게 감사해야지! 미래에 늙은 김희량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그래서 ‘다!다!다!’를 다시 보며 어린이 김희량, 이십대 김희량, 늙은 김희량 셋이 만나는 순간을 기대해야지. 나중에 꼭 다시 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