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나의 부족함을 목격하고 말았다. 지난 글은 주변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받았던 글이었다. 사실 반응해준 사람은 서너 분에 그치지만, 독백과도 같았던 보통의 글에 비하면 한층 데워진 글이었다. 아무래도 시의성이 무지 좋았던 듯하다.
글을 쓸 때면, 언제나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히 읽어내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이 사람은 내 생각이 얼마나 유토피아적인지, 내 글은 얼마나 피상적인지, 논리는 얼마나 얄팍한지, 길다란 검지손가락으로 날카롭게 짚어낸다. 나는 이 사람에게 부족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쓰고 싶은 문장과 써도 괜찮은 문장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찾아간다. 이 사람은 내 상상의 독자다.
지난 글에서 신경 쓰였던 문장이 있다. 갤 가돗이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니 전쟁을 옹호하는 것 같았다는 내용이다. 편평한 글에서 옹이마냥 툭 튀어나와 까끌까끌하게 거슬렸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다. 상황을 한국으로 이동시키고 나의 정체성을 적용하면, 한국의 편을 드는 것이 전쟁 옹호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참여 집단에 속하면, 전쟁은 옹호할 대상도 비판할 대상도 아니었다. 옹호나 비판은 제3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갤 가돗이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이상, 그리고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이상, 그는 전쟁 바깥에 위치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 글을 쓰거나 생각을 말할 때 위기감처럼 느끼는 기분이 있는데, 이는 내 머릿속 유토피아에 기인한다. 논리적인 싸움에서 이상적인 생각은 약점이다. 보통 비웃음을 받는다. 우리에겐 현실적인 논의만이 유의미하다. 우리는 현실에 살고 있으니까. 그리고 현실은 복잡하고 어렵고 얽히고 설켜 있으니까. 그래서 이상을 간절히 바라는 나의 생각과 논리는 약점이다. 이때 내가 느끼는 위기감은 곧 부서질 것 같은 다리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다리를 부수는 건 현실적인 논리로 무장한 비판이다. 지난 글도 비슷했다. 이미 전쟁이 일어난 상황에서 평화를 바라고 있으니 얼마나 무용한 일인가. 나는 얄팍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도 꾸준히 부르짖어야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전쟁을 현실적인 논리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감정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다.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라, 그들의 하루하루를 밀착해서 바라보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인용한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으니 전쟁이 구체적인 대상으로 변모했다. 자신이 죽이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 전쟁에 참가한 청소년이 노인이 되도록 큰 소리에 덜덜 떠는 이야기, 적군이든 아군이든 살리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가 무수한 죽음과 교차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전쟁은 그 단어조차 입에 쉽게 담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전쟁을 미시적으로 보면, 그 어떤 정치와 이해 관계도 비폭력으로 풀어내기 위해 애쓰지 않을까. 이건 정말 비현실적인 바람일까?
자꾸만 누군가가 내 글에 대해서 말을 거니, 글을 지우고도 싶었다. 비약적인 논리와 유토피아적인 생각이 가득한 글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동시에 애정하는 친구의 훌륭한 글을 읽어내리니, 또 한번 도약하는 친구를 예찬함과 동시에 내 글의 궁색함이 두드러졌다. 그래서 다시 써보았다. 고치기 위해서 새로 써내려갔으나, 나는 똑같은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젠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꽃밭은 지울 수 없고, 나름대로 의미 있다.
나는 보통 틀리면 수정한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언제나 수정한다. 만약 수정을 못하는 상황이라면 아쉬워하거나, 실수 또는 오류를 지적 받을까봐 전전긍긍해한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나의 서투름을 고스란히 남겨놓겠다. 부족할지언정 실패하진 않았다. 이 글은 오류를 대면하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