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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미모미 MomiMomi May 26. 2020

아이들 덕분에 누리는 휴일 풍경

부모를 키우는 아이들



둘째 기침소리에 눈을 떠보니 휴일 아침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감기에 걸린 둘째가 내 품 안으로 파고든다. 빗소리를 들으며 가냘픈 아이를 안고 있다 보니 마음이 절로 포근해져 온다. 내가 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나를 안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글을 쓰기 위해 공부방으로 조용히 나왔더니 어느새 둘째가 이불을 끌고 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발 밑에 누워 베시시 웃고 있었다.

힘든 일을 함께하는 추억 데이다. 가족 등산이 있는 날.


아이도 남편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오늘 등산은 쉬는 게 좋을 듯싶지만, 남편은 우비랑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몸을 움직이면 오히려 감기를 떨굴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아이들은 우비를 입고 비를 맞는 것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사람들이 드문 비 오는 숲 속엔 마운틴 가드가 나타날 수 있다며 아이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우비를 입은 마운틴 가드(mountain guard)를 만나자며 아이들이 먼저 현관을 나섰다.

몇 주전 이슬비가 왔을 때 찾은 숲과 오늘의 숲은 또 달랐다. 지난번 봄비 등산이 안개 자욱해 반지의 제왕을 연상케 하는 눈이 황홀한 등산이었다면 오늘의 산은 장대비 소리에 귀가 씻기는 산행이었다.

삼십 분 즘 오르다 도룡 정에 도착하여 굵어진 빗방울을 피했다. 정자에 앉아 팔각정의 꼭짓점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더니 이내 아이들이 빗소리를 녹음하자고 했다. 잠이 솔솔 오게 하는 빗소리라며 아빠가 잠이 안 올 때 ASMR로 사용하면 좋겠단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지극정성인 것처럼 아이들도 늘 아빠를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화봉산자락의 장대비 소리를 나의 휴대폰에 담기 시작했다.

비록 휴대폰에 녹음된 소리였지만 시원시원한 비와 땅이 부딪치는 소리는 고유의 생동감 있는 음파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노래하는 새의 음성까지 더해져 제법 훌륭한 ASMR이 되었다.


‘후드득 후드득, 쏴아 쏴아, 휘리릭 후드득’



등산 도중 아이들은 드디어 우비를 입고 뛰어다니는 마운틴 가드를 만났다. 맨발 차림에 기운이 넘치는 가드였다. 아이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어느새 사라져 버린 마운틴 가드의 등산법을 흉내 내며 산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판죠 우비를 날개처럼 펼치고 뛰는 모습이 딱 날다람쥐 같다.


 아프다며 골골대던 아이에게서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신기한 마음에 몇 발짝 따라서 뛰어보지만 아이들처럼 몸이 가볍지 않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

하산해서 물기를 닦아낸 뒤, 아이들이 사랑하는 성심당 DCC점으로 향했다. 코로나 19로 지역경기가 힘들다고는 하지만 성심당은 어제도 오늘도 인산인해다. 입구에서 손 소독과 체온을 재고 마스크를 착용한 뒤 성심당 입장. 아이들은 다양한 빵을 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같으면 시식 빵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지만, 전염병 때문에 시식 빵이 없어도 웃음 한가득이다.


큰 아이는 달콤한 렌치 드레싱이 들어간 샐러드 샌드위치, 작은 아이는 기다란 그릴 소시지 샌드위치, 남편과 나는 짭조름한 명란 바게트와 산양 우유를 담았다. 근처 로컬 푸드 매장에 들려 신선한 채소와 솜씨 좋은 서울 반찬 아주머니가 돌돌 말아준 김치 김밥 두 줄과 뜨끈뜨끈한 불 난 집 호떡 4개도 샀다. 등산을 마치고 먹는 점심은 꿀맛이었다.

보문산을 찾은 날에는 만두전골, 우성이산은 성심당 샌드위치와 로컬 매장에서 김밥, 장군산에서는 봉골레 스파게티와 화덕피자를 먹는다. 우리가 찾는 산마다 근처에는 산과 맛을 연결 짓게 하는 다양한 음식점이 있어 가족 등산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집에 돌아와 목욕을 하고 산에서 담아 온 빗소리를 들으며 온 가족 낮잠 타임을 가졌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둘째 이불을 덮어주고 저녁을 준비하러 나왔다. 남편과 큰 아이는 어느새 일어나 함께 수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남편과 아이들은 집 앞 서점에 들러 한아름의 책을 사 왔다. 지원금으로 받은 포인트로 구입했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책을 읽어주는 아빠 옆에 아이들은 족집게 하나씩 집어 들고 껌 딱지처럼 딱 붙었다.  식탁에 앉아서 셋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아빠의 머리를 반씩 나누어 흰머리를 뽑아주는 아이들의 모습이 털을 골라주는 원숭이 가족 같았다. 검은 머리를 뽑으면 게임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아빠의 엄포에 아이들은 흰머리만 골라내느라 작은 입술을 오므리며 집중하면서도 아빠가 읽어주는 책 내용에 감나라 배나라 잘도 재잘거린다.  

겉으로 보면 부모들은 인생을 희생하여 자식들에게 헌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부모들의 삶의 동기와 과정과 결과는 모두 아이들과 연관되어 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눈을 뜨기 싫은 아침 일찍 일어나 목적을 갖고 하루를 살고, 힘든 일들을 해낼 수 있을까? 아마 늦잠을 자고 휴대폰 검색 좀 하다가 휴일을 흘려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타고난 귀차니즘으로 오늘은 하고 내일은 안 하고 들쭉날쭉 내키는 대로 사는 삶을 살 수도 있다. 나 혼자 먹겠다고 절대 5가지 영양소를 챙긴 식사를 준비할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은 게으른 부모들을 일으키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늘에서 보내준 선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싸우고, 해도 끝이 없는 일에 허덕이고, 의견이 다른 남편과 논쟁을 할 때면 아이들 때문에 가끔은 집에 갇혔다는 어두운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아이들 때문에’ 뭔가를 못하고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붙들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을 안다. ‘아이들 덕분에’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보게 되고,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고 넘게 되면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한 삶을 살고 있음을 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그저 그런 나에 그쳤을 인생을 우리로 확장하면서 한계와 포기를 만나면서도 한층 깊은 곳으로 다다랐다. 애초부터 부모 자격이 있어서 아이들이란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 부모 자격을 하나씩 하나씩 배워가고 있다.

월요일. 지지고 볶는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함께 자라고 있음을 알기에 지지고 볶는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미소와 만족감을 끌어내는 한 주가 되기를 기대한다. 때문에 가 아닌 덕분 에로 채우는 일상과 함께 만족의 웃음이 아이들을 통해 세상에 전해지기를……어느새 작은 아이가 옆에 와서 더듬더듬 내가 쓴 글을 읽고 있다.

“엄마, 글쓰기 빨리 끝내고 아침밥 차려줘요. 깍지 콩 먹고 싶어요.”

아이들이 없었다면 절대 먹지 않을 음식인 깍지 콩을 삶으러 이만 글을 마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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