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사태로 학교를 가지 않는 아이들과 집안에서 독서와 DVD 시청으로 일상을 채우고 있다. 일상을 빼앗긴 듯 하지만, 빌 게이츠 회장의 말대로 코로나로 인해 못 들은 척 무시해왔던 소중한 메시지들이 우리의 가슴 밑바닥을 울릴지도 모르겠다.
덜 소중한 것들을 모두 걷어내고 남아있는 것의 의미가 한 층 더 두텁게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결국은 본질 중에 본질일 것이기에 이 시기가 지나 희미해지기 전에 선명하게 붙잡고 싶다.
그중에 하나가 가족과 함께 공유하는 시간 그리고 독서를 비롯한 일상을 통해 만나는 진리들이다.
‘톰 소여의 모험’을 좋아하는 둘째 아이는 DVD를 볼 때도 엄마를 옆에 앉혀놓고 즐거움을 공유하길 원한다. 저녁 설거지를 뒤로 미룬 채 아이 옆에서 포로가 되었다.
몇 번째 반복해서 보았기 때문에 아이는 줄거리를 다 알고 있음에도 매 순간 즐겁고 무섭고 짜릿한 장면들이 여전히 처음처럼 느껴지나 보다.
아이는 장면 마디마디에서 내 팔꿈치를 끌어당기며 때론 함박미소로 때론 무서워서 실눈으로 톰의 모험을 함께하고 있다. 아이 덕분에 동심에 젖어 톰 소여와 함께 모험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참말로 오랜만이다. 예닐곱 살 때 TV에서 봤으니 몇 년 전인가? 볼수록 재미있어서 끝 편까지 보게 되었다. 어렸을 때 봤던 톰 소여와 마흔이 넘어 바라본 주인공 톰은 전혀 다른 인물로 보였다.
열 살 남짓한 남자아이를 통해 인간의 본성들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었다.
모험심, 두려움, 허세, 불의에 도전, 부에 대한 열망, 가족에 대한 사랑,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내면 상태를 가식 없는 열한 살의 소년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고전과 세계명작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성을 묘사한다는 세계문학의 힘을 톰 소여의 모험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톰, 이 녀석은 본능에 굉장히 충실하다.
놀고 싶을 때 놀고 또 뭔가를 경험해야 할 때 온몸을 던진다. 온갖 말썽과 사고를 몰고 다니기에 늘 야단을 맞지만, 장차 큰 인물이 될 떡잎이다.
톰을 아들로 두었다면 폴리 고모처럼 잔소리 꽤나 해대면서 열 살은 늙었겠지만, 뭔지 모르게 믿음직한 구석이 있다. 이 녀석은 사고는칠지라도 도를 넘지는 않을 거란.
세상의 이치를 알려준 톰 소여
톰의 모험 중에서 뇌리에 박힌 두 개의 상반된 장면의 모험이 있다. 이 두 모험을 통해 나는 부자가 되는 이치 또는 진정한 가치가 있는 곳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모험을 좋아하는 톰은 친구와 증기선을 타고 멀리 가보고 싶다. 증기선을 사기 위해 부자가 되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톰은 냇가에서 놀다가 금이 박인 조약돌 한 개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생업을 포기한 채 금을 채취하기 위해 몰려든다.
미국의 전역에서 금을 찾기 위한 ‘골드러시’가 이어진다. 하지만, 아주 극소량의 사금만 발견할 뿐 모두 허탕이다. 사람들은 금이 있을 거란 희망을 쉽게 버리지 않고 더욱 집착하며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톰은 그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금이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데, 사람들은 소문만 듣고 점점 더 몰려들고 있어.”
보통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모인 곳에 정답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곳에 쏠림이 일어나게 되고, 가치로운 것들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진다.
반대의 그림은 공동묘지 뒤에 있는 으스스한 유령의 집에서 펼쳐진다. 아무도 그곳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주인공 톰 말고는.
톰은 타고난 모험가다.
그곳이 더럽고 무섭고 예측 불가능 한 곳임을 알고 있다. 벌벌 떨면서도 허클베리 핀을 꼬드겨 기어코 집 안으로 발을 집어넣는다.
물론, 톰은 금을 찾기 위해 그곳에 간 것은 아니었다. 친구 허클베리의 나무집이 태풍으로 망가져 좀 더 튼튼한 집을 찾아주기 위해서였다.
나라면 세상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는 버려진 곳을 향해 길을 떠날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만약 그곳이 덜 무섭고 덜 더럽다 해도 속세와 연결되지 않은 어떤 곳에 눈길이나 줄 수 있을까?
톰을 보며 모험심 제로의 나를 만났다.
가족이 딸렸으니 인생을 건 대모험은 아닐지라도
나의 루틴 안에서 작은 다른 시도마저 해본 적이 별로 없다. 해보지 않은 일,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은 나에게 불가능한 일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내가 20대 아니 30대 초반으로만 돌아간다면 시도해 볼 거야.’ 상상해보지만 그건 내 인생을 참말로 작게 본 것이다.
만약 지금 70세 정도 되었다면 아마 이렇게 생각할 테니 말이다. ‘내 나이가 40대만 됐어도 인생 겁낼 것 없겠어.’라고 지나간 40대에 대한 미련을 마구 쏟아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그렇게 찾던 금은 거미줄과 박쥐가 가득하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으스스한 폐가의 땅에서 발견된다. 그것도 아주 많은 양의 금이 모두가 꺼리는
그 장소에 숨겨져 있었다.
이 장면에서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았다.
두 가지 음성이 들렸다.
‘바보야, 세상의 진정한 가치는 네가 쫓고 있는 세속에는 답이 없어.’
‘답을 알려줬는데, 시도나 해볼 수 있겠어?’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뭘까? 물질일까? 자유일까?
무엇을 찾고 있었든 그것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린 곳이 아닐 것이다. 나는 그것을 향할 용기가 있는가? 요즘 읽는 책들도 하나같이 동일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메시지를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채 계속 듣고만 있다. 괜스레 듣지 말아야 할 메시지를 훔쳐보느라 가지도 못할 길 헤매지 말고 하던 것이나 잘할 것인지 아니면 메시지의 눈곱만큼이라도 발을 담가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