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한 나의 닉네임은 발걸음이다. 성인이 된 후 처음 집단상담에 참여했을 때, 닉네임을 정하라고 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고 약 3분 후,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단어는 ‘발걸음’이었다.
사실 나에게 발걸음이라는 단어는 상징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나의 발은 오랜 기브스로 인해 모든 발가락이 엉키고 설킨 채로 굳어져 걸을 때 발가락이 땅에 닿지 않는다. 그로 인해 나는 보통 사람들처럼 뒷꿈치부터 땅을 딛고 발바닥 중앙을 거쳐서 다섯 개의 발가락과 함께 땅을 지탱해 걷는 과정으로 걷지 못한다.
나는 일단 약간의 뒷꿈치 힘과 발의 가장자리 부분을 딛고 걷는 편이다. 그래서 내 발의 가장자리 부분은 오랜 세월 굳은살로 매우 단단해져있다. 다섯 발가락으로 땅을 안정적으로 지탱하지 못하니, 나의 걸음걸이는 당연히 어딘가 모르게 매우 어설프고 박자가 맞지 않으며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 나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장애인인 줄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와 가까이서 발걸음을 나란히 걸어본 사람들은 안다. 내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것을. 물론 나와 걷는 모든 사람들이 눈치채는 것은 아니다. 간혹 매우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들, 사소한 것도 알아차리는 유형의 사람들은 귀신같이 알아채는 것이다.
사실 나는 사람들이 내 걸음걸이의 어색함을 알아차리는 것이 무척 창피하고 싫다. 나의 약한 부분을 들켜버리는 것과 같으니까.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종종 다른 사람들과 발걸음을 나란히 걷는 것을 피하기도 했다.
누군가와 걸어야 할 일이 있으면, 일단 거짓말로 둘러대기 시작한다. “아, 저는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해서요”, 혹은 “저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하고 익숙한 듯 혼자만의 발걸음을 옮겼다.
집단상담에서 사용할 닉네임을 정하라는 말에 발걸음이 제일 먼저 떠오른 이유들이 바로 이것들이었다. 하지만 집단상담 사람들에게는 그 사실은 숨기고 다른 이유를 댔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장애사항을 숨기고 싶었고, ‘발걸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더 긍정적인 의미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집단에서 닉네임을 발걸음으로 지은 이유에 대해 나는 대답했다. “발걸음이라는 단어가, 한 걸음 두 걸음 여러 걸음이 쌓여서 만들어진 단어잖아요. 저도 이 집단상담의 멤버로서 앞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더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짓게 된 닉네임입니다” 내 대답을 듣고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성공이다!
이후 다른 요일과 시간대의 집단으로 옮겼을 때에도 처음 보는 집단원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 때도 나는 ‘발걸음’이라는 닉네임의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나는 첫 번째로 했던 내 소개와는 다르게 또 다른 의미의 ‘발걸음’을 이야기했다.
“제가 사실 발걸음이 남들보다 조금 많이 느린 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발걸음을 맞추어 걷는 일이 어려운데, 이곳 집단상담에서 만큼은 다른 분들과 발걸음을 나란히 함께 맞추어 걸어가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정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참여한 집단상담에서의 내 소개는 첫 번째 때와 사뭇 달랐다. 두 번째 소개에서도 역시 나는 나의 장애사항을 오픈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나의 발걸음이 느리다는 것을 알리며 좋은 뜻을 찾아낸 것 같다. 이후 집단상담이 20회기 이상 진행되면서 서서히 나는 나의 장애사항에 대한 오픈을 했다. 그리고 그제야 모든 사람들이 아! 발걸음! 그거였구나!! 라고 완전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발걸음이라는 단어와 내가 부여한 그 의미는 아직까지도 매우 특별하다. 발걸음이라는 단어는 가장 함축적으로 나를 표현하는 단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비단 걸음걸이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앞으로도 이야기 할 내용이지만, 나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내가 다른 사람들과 여러 방면으로 아주 다르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특히 나는 사람들 속에서 매우 뒤처지거나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발걸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늘 사람들 속에서 걸으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다들 원래는 내 뒤에 있었지만 수 초가 지나면 곧 나를 앞질러 가는구나. 길 위에서도, 횡단보도 위에서도, 학교 안에서도, 건물 안에서도. 이렇게 늘 뒤처지는 나를 보며 한때는 나의 처지를 매우 비관했다. 그 우울하고 비관적인 마음들은 결국 자기비난과 자학으로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이런 내가 다른 사람들과 발걸음을 같이, 나란히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다니. 여전히 스스로의 발걸음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내가 걸음이 느리니, 양해해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여전히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세상에서 나의 뒤처지는 발걸음을 홀로 두고 싶지는 않은 마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