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작가 Sep 09. 2023

아픈 애

마음이 부서진 이야기

나에게는 장애가 있다. 어릴 적 선천성 수직 거골 이라는 병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사실 그 병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자면, 태어날 때 나의 양 다리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접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 고향 대구에 있는 대학병원 의사는 우리 아빠에게 다리를 절단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말에 화들짝 놀란 우리 아빠는 당장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예약을 걸어 나를 데려갔다. 그곳의 의사는 다행스럽게도 절단하지 않아도 되며 깁스를 이용한 교정만으로 치료가 된다고 했다. 이렇게 나는 두 다리가 절단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의 나의 성장과정은 꽤나 험난했다. 깁스 교정과 두번의 다리 수술 후에 걸을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어릴적 나의 걸음걸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나와 다른 친구 한 명 그리고 우리 엄마 이렇게 셋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그때 그 친구가 우리 엄마에게 물었다.


“아줌마, 걸음이는 왜 이렇게 걸어요??” 순간,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내가? 내가 다르게 걷는다고????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때의 그 장면이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날의 친구의 물음으로 인해 나는 점점 더 의기소침하고 소심한 아이가 되어갔다. 초등학교 때는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내 걸음걸이를 따라하며 놀렸고 그덕에 초등학교 내내 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엄마는 밤마다 나를 공원으로 끌고 가 다그쳤다.


“너는 왜 친구가 없니??? 왜 친구를 못사귀니??”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내 잘못이라고? 친구가 없는게 내 탓인 양 윽박지르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동시에 어린 나는 엄마 말이 모두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잘못된 것 같아. 내가 잘못된 사람인거지. 하고 속으로 말을 삭혔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조금씩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는데. 어느 사생대회 날이었다. 같이 다니는 무리 중 한 친구가 나를 따로 불러 말했다. “아픈 애들은.. 좀 짜증이 많고 그러지 않나?” 순간 나는 너무 당황해서 그 친구 앞에서 우물쭈물 제대로 대답도 못했던것같다.


아픈 애들. 아픈애. 얼마 못 가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앞에선 걸음아~ 라고 친한척 내 이름을 불러왔던 친구가. 사실 내 뒤에서는 다른 친구들과 같이 나를 “아픈 애” 라고 칭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때 받은 충격도 역시 무척이나 컸다. 아마 이때부터 나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 부분이 깨어져 버리지 않았나 싶다.  

    


모두가 내 앞에서는 친한척, 날 좋아하는 척 했지만 뒤에서는 내 친한 친구에게 왜 저런 애(나)랑 노는 것인지 이야기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나를 “아픈 애” 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것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이것은 내가 다른 아이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런 어릴적 경험들로 인해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꽤나 오랫동안 나는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가끔 누군가가 다가오더라도 가시를 잔뜩 세우고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특히 25살에 첫 상담을 시작할 때, 이 신뢰의 문제가 크게 화두가 되었다. 이때 나는 약 3년간 한 상담자와 상담을 진행했는데, 3년이 다 되어 갈 즈음까지도 상담자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상담실에서의 나는 1시간 동안 침묵을 하거나, 과거의 힘든 이야기를 하면서도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웃기 일쑤였다. 상담자는 이런 나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결과적으로는 상담자인 자신과 관계를 만들어 내도록 했다.  

    

하지만 나는 상담자와의 관계형성은 커녕, 나를 지적하는 상담자에게 깊은 분노를 표출하기만 했다. 상담장면에서의 분노표출은 적었지만, 상담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상담자에게 문자를 300통 이상씩 보내곤 했다. “너 죽여버릴거야!” “너 내가 그렇게 우스워?” “너 이 바닥에서 상담 못하게 만들거야” 라는 식의 분노섞인 협박문자였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치료자들을 잘 신뢰하지 못한다. 가까스로 라포형성은 해냈지만, 반쪽짜리 신뢰 라고 해야할까? 치료자들이 내 구미에 맞추지 않으면 그들을 최악의 치료자라고 탓하고 있고, 어쩌다 내 구미에 맞는 말이나 행동을 해주면 최고의 치료자 라고 칭하고 있다. 또 그들은 언제나 나를 거절하고 배신하고 떠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 그럴만한 제스쳐가 보이면 나는 바로 버림받을까에 대한 두려움에 덜덜 떨게된다.   

   

학창시절 장애로 인한 나의 경험은 지금의 내 치료관계에도 여전히 악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간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조금씩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것 같다. 어린시절 사람에 대한 신뢰가 깨어진 기억. 트라우마라고 칭할 수 있을 법한 나의 상처는 현재의 내 다른 관계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연 나는 앞으로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