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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작가 Jun 26. 2020

그래! 이혼해줄께!

일생일대 시련을 극복하다

나의 결혼은 준비 없이 시작되었다. 

사랑 하나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어설픈 투구를 쓰고 조랑말에 올라탄 돈키호테처럼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갖은 건 없었지만 서로아끼며 성실하게 살면 점차 나아 질 거라 생각했고 그 것이 사랑이라 믿었다. 

결혼식 때 주례선생님이 낭독해주신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흰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 까지....” 

라는 교과서 같은 주례사가 현실에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느낀 것은 반년도 지나기 전이었다. 

아들이 태어나고 일주일만에 산후조리원에 와이프와 아들을 남겨두고 외삼촌과 사업차 경남 양산으로 내려갔다. 비장했다. 나는 내가 꾸린 가정의 가장이고 지금껏 살아온 것보다 

더 열심히 살아갈 자신이 있었고 그러면 비루하게 시작된 나의 가정에도 조금씩 예쁜 색이 채워 질거라 믿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많이도 어렸었다. 아무런 무기를 장착하지도 않고 패기 하나로 적진에 뛰어들어 그나마 갖고 있던 아이템마저 뺏기며 장렬히 전사하는 게임 속 캐릭터 같았다. 캐릭터는 다시 태어나며 회복이라도 되지만 현실은 잔인하기만 했다.       


내가 맡은 매장은 대형쇼핑몰에 입점 되어 있었는데 쇼핑몰이 초반부터 휘청였고 나 역시 돈벌이가 쉽지 않았다. 가정 경제는 항상 어려웠고 돈 문제로 와이프가 뱉는 비수 같은 말에 언제나 마음을 다쳤다. 이건 아니었다. 꽃동산을 찾으러 넘어간 언덕에서 마주친 것은 시커먼 늪이었고 나는 계속계속 빠져들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가장이니 포기할 수 없었다. 매장 일을 마치면 호프집 알바를 했고, 쇼핑몰이 부도가 나서 매장을 운영하지 못할 땐 새벽에 창고에 나가 일을 했다. 함께 내려갔던 삼촌도 나를 건사할 뾰족한 방법이 없었고 나도 마냥 도움을 받길 기다릴 성격은 아니었다. 스스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는 수없이 항상 해오던 수영강습을 위해 새벽타임에 입사를 하고 오후3시에 퇴근하고는 태권도도장에 사범으로 들어가 일을 했다. 정말로 열심히 했다. 적어도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와이프도 뭐라고 하기보단 믿어 줄 거란 생각이었다. 


나는 현실이라는 것이 그렇게 잔인한 것인 줄 결혼 후 양산에서 뼈저리게 알았다. 

돈이 없어서 슬프진 않았다. 나에겐 사랑하는 와이프가 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의 노력이 배우자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 힘들었다. 부부싸움이 잦아졌고 어느날부터 와이프는 이혼하자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타일렀다. 그 말 앞에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화내지 않았다. 어쩜 그것은 훗날에 내가 화를 내기위한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먼저 타이르고, 타이르고, 타이르고 그래도 안 되면 칼같이 인연을 자르던 사람이었다.    

“부부싸움은 할 수 있지만 격해진 감정에 못 이겨 함부로 이혼이라는 말을 하면 안되요. 

부부끼리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는 거예요. 다음엔 그런 말을 안했으면 좋겠어요. 나도 더 열심히 일하도록 할께요“ 나는 감정이 상해서 말을 할 때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 존댓말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나의 논리는 와이프에겐 닿지 않는 듯했다. 내가 믿고 있던 사랑은 이미 저 멀리에서 등을 돌린 채 나를 힐끔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후에도 와이프는 감정이 격해지면 이혼하자는 말을 서슴없이 했고 내 가슴이 처절하게 다친 어느 날 

원하던 이혼을 해주겠노라하며 집을 나왔다. 

서로 떨어져서 2주간의 시간이 흘렀고 양산의 살림을 정리하는데 2주정도의 시간이 소비되었다. 와이프는 인천의 처가로 나는 경북 영양의 본가로 돌아가 귀농을 선택했다. 이혼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네 살배기 아들이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에 적응이 필요하기도 했고 당장 우리부부가 쏟아낸 쓰라린 물에 놀란 아들이 걱정이었다. 서류에 도장은 맘먹으면 언제든 찍을 수 있는 것이었다.  

    

1년여의 별거를 마치고 지금은 세 식구가 함께 도란도란 살며 예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다. 늦둥이로 태어나 원하는 것은 대부분 손에 쥐고 산 와이프도 이제는 험난한 세상에 어느 정도 타협이 된 듯하다.

별거를 경험하며 많은 것을 느꼈다. 누구나 인생에 가장 힘든 시간들이 관문처럼 다가오고 

내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그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전쟁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비참한 일이다. 이혼전문 변호사와 상담도 여러 번 했는데 그들은 한 결 같이 말했다. 

“합의 이혼 하세요. 어쨌든 법정에 가면 싸워야하고 서로 이기려고 하는 중에 더 큰 아픔이 생깁니다.” 라고... 

내가 서둘러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은 것은 와이프에게 받은 상처만 가지고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리숙한 남녀 사이에서 죄 없이 태어난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고 내가 사랑이라 믿고 선택한 사람과의 관계가 더 잔인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내가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 그 인연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이젠 사랑을 슬며시 밀어내고 삶속에 또아리를 틀었다.    

  

다시 연애 때처럼 사랑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풋풋했던 사랑은 시련을 겪으며 성장했고 세상에 나를 적응시키며 의무라는 여운을 짙게 남겼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은 철없는 남녀가 만든 그림자에 가려진 신혼생활 5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어지간한 고난 따위는 콧방귀로 날려버릴 만큼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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