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머니펌프 Jun 28. 2020

종양을 안고 살으라고?

"이런 경우는 의사생활 30년 동안 딱 두 번 봤어요."  



내겐 아픈 손가락이 하나 있다. 왼쪽 검지손가락. 

의학적 용어로 <좌측 제2수지> 라는 것은 얼마전 수술을 준비하며 알았다. 

같은 곳만 벌써 세 번째 수술이다. 군시절에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처음 수술을 받았고 

두 번째는 양산 부산대 병원, 그리고 3개월 전 부천의 어느 손전문병원에서 세 번째 수술을 받았다. 

손가락 첫 마디부터 시작해 손바닥을 지나 손목을 조금 못 미치는곳까지 선명히 보이는 기다란 흉터는 

지칠대로 지친 녀석의 애처로운 행색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말이라도 할 수 있다면 

겨우 세어나오는 숨에 소리를 얹으며  "이젠 그만 하고싶다..." 라고 기어들어가 듯 말 할 것만 같다. 




손가락의 신경을 부둥켜 안고 기생하듯 붙어 있는 종양은 이미 중지 손가락으로 이어지는 손바닥의 가장자리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원활한 손가락의 운동능력을 살리기 위해 조금도 떼어내지 못하고 수술을 마쳐야한다는 것을 나는 수술대 위에서  들었고 선택의 여지 없이 동의 해야만 했다.  예리한 도구들의 분주한 소리는 차가운 수술실에 질서 없이 떨어졌고 나의 손바닥은 불청객에 인질로 잡힌체 힘없이 열려 있었다.

감각 없는 왼팔에 둘러선 의사선생님들은  "이건뭐지? 이런 건 본적이 없는데?" 라는 확신 없는 대화를 나눴고나는 더욱 긍정적인 생각이 끊기지 않도록 집중했다. 

< 달랑 검지 손가락 하나다.

왼손일 뿐이야. 오른손이 아니니 다행이지. 

손가락이 없는 것도 아니쟎아. 

의사들은 원래 말을 무섭게하니 별일 아닐꺼야. >

속으로 곱씹는 말들이 하나 둘씩 머릿속을 돌고 돌아 실타레처럼 꼬일 때쯤 원망 할 수 없는 분노가

밀려왔다. 분노는 분노일뿐 꼼짝없이 수술대에 누워 몸을 맡겨둔 상태로 내가 할 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노를 절망과 두려움으로 바꿔버렸다.  이번 수술에 성공하면 꼭 기타를 다시 배워야겠다는 계획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불청객앞에서 초라하게 주저 않았고 절대 기타를 튕기는 낭만을 맛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때쯤 초록색 수술천이 겉히고 나를 싣은 침대가 얄궂은 바퀴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수술을 마쳤던 지난 과거부터 이번 수술까지 정확한 병명과 원인을  알아내진 못 했다.  

이번 수술로 확실 해진것은 

<계속 재발 되고 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 > 

적어도 아직까진 말끔히 제거할 방법이 없고 통증이 심해지면 언젠가 또 다시 수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한 두번 했던 수술이 아니기에 언제쯤 폭풍처럼 통증이 몰려 올지 알고 있었다. 고통을 기다리는 시간은 이미 그시간부터 고통속에 들어 앉아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취가 깨는 그날 밤에 아무리 몸을 돌려누워도 그칠 줄 모를 통증이 왔고 예상했던 것 만큼 새벽은 길었다.  

작가를 갈망했던 욕심때문일까... 쉬지않고 찌르는 고통마저도 꼼꼼하게 느끼고 있었기에 통증은 더욱 심했다. 

삶의 지침이 될 무언가를 깨우치려 애썼다. 애썻다기 보다는 난 이미 그렇게 변해있었다. 아직은 보잘 것 없는 필력이지만 꾸준히 매일 느끼고 내 것으로 기억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은 강박에 가까웠다.  


< 고통은 스스로 감당 해야 하는 것이다. > 

알고 있었고 실천하며 살았지만 더욱 뼈속까지 박혀버린 진리가 되었다. 통증완화제가 얼마나 들었는지도 모를 닝겔을 바라보며 홀로 고통을 견디는 것은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나눌 수 없었고 아무리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도 전가할 수 없었다. 갑자기 마음이 고요해졌다. 손가락에선 아직 메스가 남아 휘젖고 다니는듯 아팠지만 마음의 파도는 서서히 잔잔해졌다. 

명제는 그 만큼의 힘을 갖는다. 어떻게 할 수없는 딱 그것이라는 확고한 자리가 있다. 고통을 나눌 수 없이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한다면 손가락의  통증도 내 머릿속의 절망과 두려움도 그대로 살려둬선 안됐다.  그 것은 소중한 내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었다. 답은 간단했다. 닝겔에 무통주사를 더 넣어달라 해야했고 내 머릿 속엔 빨리 희망적인 메세지를 주입하는 것이었다. 바로 비상벨을 눌렀고 달려온 간호사에게 너무 아프니 주사를 더 달라했다.  그리고 가만히 누워 내가 갖은 희망적인 메세지 중 쓸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계속 고요했다. 코로나로 인해 병실에 면회자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고 침상마다 커튼이 쳐져있어서 큐브안에 홀로 있는 듯 했다. 

희망적인 메세지를 쉽게 찾을 수는 없었지만 병원을 나갈 땐 가벼운 마음으로 나갈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나는 어렵고 힘들 때마다 긍정의 힘으로 극복했던 사람임을 알고있었다. 




<100세 시대! 한 두가지 병은 어루고 달래서 안고 사는것! > 유레카! 

찾았다! 이 상황을 위로해 줄 한마디를 짜집기해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에 들었다. 

병원으로 오는 엄마의 전화에 좀 더 밝게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이번 수술은 우리 엄마가 가장 걱정하고 미안해 했었다. 진작부터 손가락을 치료해 주지 못한 부모의 방관(?)같은 것이 죄책감이되어 항상 엄마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나는 원망 한적이 없는데 말이다. 

왼쪽 검지손가락이 굽혀지지 않고 손바닥까지 생긴 상처는 무언가 스치기만해도 소름끼치는 느낌이 온다. 

왼손에 무언가 닿는 것 같으면 잽싸게 손을 빼버리는 습관은 진작부터 생겼다. 

와이프나 아들이 손을 잡으려해도 무심코 빼버리게 되는데 아들에게는 항상 설명 해줘야 한다. 

<미안! 아빠가 손이 좀 아파서 그래. 오른손으로 하자! >  그럴 땐 꾀나 어른스럽게 수긍해주지만 

<나도 아빠처럼 손가락 아프면 어떻게?> 라며 아빠를 꼭 닮은 자신이 그 아픔마저 닮게 될까봐 걱정하는 질문을 할 땐 마음이 아프다.  간혹 수영을 너무 잘한 제자들에게 급히 엄지척을 해줄 때가 있는데 굽어지지 않는 검지때문에 엄지척인지 허공에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건지  난감할 때도 많다. 바보같지만 매력적인 것으로 덮고 웃어넘겨버린다.

   

만들기를 좋아하는 내게는 굉장히 불편하다. 새로 시작한 가죽 공예는 아픈 손가락에 대한 나의 거센 반항이었다.  주위에선 더 회복하고 시작하라고 했지만 나는 실밥을 뽑기도 전에 재료를 사서 시작해버렸다. 

<손가락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나는 무언가 계속 해낼 것이다!> 라는 암묵적인 메세지를 행동으로서 스스로에게 각인 시킨것이다. 손가락도 나의 일부니 이렇게 하면 적응 할 것 같았고 내가 이겼다. 초보라 서툰 것 말고는 

만족스러운 작품들이 나왔고 주위에 선물도 했다. 

예전 처럼 오토바이의 크런치를 잡는일도 가능하고 이젠 운전대를 한손으로 돌리는 것도 적응이 되었다. 예민한 작업은 검지대신 중지를 엄지와 협력하는 방법으로 하고  엄지척은 한 박자 쉬고 꼭 오른손으로 한다. 

키보드 자판도 큰 문제는 없지만 턱걸이를 할땐 이제 악력이 약해져서 스트랩을 써야 할지 고민이다. 기타를 배울 수는 없는 것도 까짓거 쿨하게 받아들인다. 다른 악기 배우면 된다.  항상 작심 삼일이었지만 그래서 준비한 하모니카가 세개나 있다. 




<신에겐 아직 아홉개의 손가락이 있습니다> 라는 농담하곤 한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 생긴 일이고 내가 잘못했거나 나쁜일을 해서 받는 벌도 아니다. 살다보면 불가항력적이 일들이 벌어지고 그때마다 절망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부분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내가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따른 결정의 문제일 뿐이다. 상황이 나를 불행속으로 행복 속으로 데려가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세번째 수술은 또 한번 나를 어른으로 성장시켰다고 굳게, 아주 굳게 믿는다. 

그 믿음이 희생당한  손가락에 대한 예의고 보상이 되어야 마음이 좀 더 편 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손자하고 낚시 가셔야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