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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니펌프 Jun 27. 2020

손자하고 낚시 가셔야지요~

한탄강 견지낚시

한탄강은 우리가족에겐 추억이 많은 곳이다.

결혼을 일찌감치 하신 부모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청춘이 녹아 앳된 모습이었고 나와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은 매일 밖에서 뛰어놀아 새까만 피부가 맨질맨질 한 꼬마들이었다. 아버지가 연천에서 군 생활을 하시는 10년 동안 한탄강은 우리가족의 전용 소풍장소였다. 아버지가 낚시를 하시면 우리는 물놀이를 했고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기도 했다. 물놀이를 마치면 엄마는 한탄강의 흐르는 물로 나와 동생을 하나씩 씻겼고 아버지 오토바이에 올라 집으로 돌아오는 은 언제나 상쾌했다.     


처음 견지낚시라는 것을 경험한 것도 한탄강에서였다.

지금의 내가 낚시 갈 준비를 할 때면 언제나 설레듯이 그날 아버지의 분주함이 그 것을 말해주었다. 주변을 살피던 아버지는 플라스틱 병을 찾아 허리부분을 반으로 자르셨다. 뚜껑이 있는 부분은 버리고 남은 부분의 위쪽에 두 개의 구멍을 뚫고 양쪽에 줄을 묶으니 목에 걸 수 있는 미끼통이 만들어졌다. 아버지는 두 개의 미끼통과 견지낚싯대를 오토바이 뒤편에 야무지게 묶으셨다. 짐을 묶는 질긴 고무로프를 당길 때마다 오토바이가 기우뚱거리며 낚싯대와 하나가 되어갔다.


한탄강까지는 20여분 정도로 기억한다. 한탄강 초입엔 발목까지 흐르는 작은 개울이 있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그곳을 지나는 것은 아버지를 따라 낚시를 가는 또 다른 재미였다. 개울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버지는 양발을 내리고 오토바이와 동글동글한 돌멩이들을 달래주듯 천천히 지나갔다. 개울을 지나고도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한참 지나야 낚시 포인트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견지낚시의 특성상 허리까지 물에 들어가서 해야 하기에 몸에 모든 채비를 둘러야했다. 목에 걸 수 있도록 만들었던 작은 통엔 구더기를 넣었다. 아버지가 낚시를 가신다고 하실 때마다 지렁이를 잡으러 다녔기 때문에 구더기 따위를 손으로 만지는 것은 고민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허리에 살림망을 하나 더 두르시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끼에 쌓인 돌에 넘어지지 않도록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아버지는 자신이 밟은 곳만 밟고 따라오라며 앞장서 들어가셨다. 포인트에 도착하고는 아버지와 마주보고 최대한 안정적인 자세로 서서 자주 움직이지 않았다. 넘어지는 순간 물에 빠지는 것도 문제지만 미끼를 빠트리기라도 하면 그날 낚시를 망치게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아버지는 바늘에 구더기를 3마리정도 꿰어 물살에 흘려보내며 처음 새끼호랑이에게 사냥을 가르치듯 시범을 보이셨다. 물살을 거스르며 몇 번의 팔을 당기다가 빠른 챔질이 한번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보며 씨익 웃으시며 낚싯대를 돌돌 말아 거두셨다. 함께 낚시를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낚싯줄을 회수하며 짓는 미소는 한 마리를 걸었다는 자신감과 상대에게 보내는 짓궂은 야유의 표정이었다.   


물살이 아버지의 허리를 껴안고 지나가는 지점에서 낚싯대가 올려졌다. 주둥이는 검으스레하고 몸뚱이는 알록달록한 피라미가 요란하게 파닥거리며 낚싯대에 매달려 있었다. 곧 내가 경험할 광경에 흥분됐지만 나는 조용히 웃었다. 물고기를 당겨 올릴 때보단 입질 할 때의 손맛이 좋았다. 내가 고기를 잡으면 두 세 걸음 앞의 아버지 살림망에 넣어야했다. 한 손에는 잡은 물고기를 꼭 쥐고 다른 한손에는 낚싯대를 들었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자세를 낮춰야만 흐르는 물과 이끼 묻은 돌을 지날 수 있었다. 고기를 잡을 때마다 살림망에 넣고 돌아오길 반복했는데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지만 그 시간이면 족히 세 마리를 더 잡을만한 긴 시간이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차분하게 그 시간을 감당해야했지만 내게도 살림망을 하나 달라는 말을 나는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게 입질이 없고 당신이 계속 물고기를 걸어낼 때면 나를 보며 눈을 지그시 감고 혀를 내밀며 약 올리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얄밉지 않게 놀리는 재주를 갖고 계셨다. 이후에도 종종 아버지와 단 둘이 낚시를 다니지만 언제나 대화보단 침묵의 시간이 길었다. 장난기가 많은가 하면서도 과묵하고, 다정한 듯하면서도 엄했던 아버지는 언제나 어려운 존재였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지만 먼저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하기엔 멀었고 다가가기 힘들었다.         


아버지는 잡은 피라미를 손질 한 후 걸쭉한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튀겨주셨다. 손가락만한 피라미를 간장에 살짝 무쳐 씹으면 고소하고 쫀뜩거려서 즐겨먹었었다.

어릴 적 피라미 먹던 생각이 나서 한날은 피라미를 잡아서 아들에게 튀겨줬다.

아직 어리니깐 안 먹으면 오롯이 나의 안주가 되겠거니 했는데 아들놈은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쉬지 않고 먹었다. 고작 4살이었던 아들은 간장을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의 어릴 때와 닮은 모습을 보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또 다른 내가 조그맣게 존재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버지가 항상 말씀 하시던 혈육이란 나와 똑같은 놈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을 알 수 있었다. 그 무한한 감동과 희열을 매번 덤덤하게 말씀하시지만 아버지에게 아들로서의 나와 손자로서의 우리아들이 얼마나 벅찬 존재인지 알고 있다.


아들 녀석이 방학이 되면 일부러 며칠씩 시골로 내려 보낸다. 목이 빠질 것 같은 간절한 그리움을 점잖게 이겨내고 계신 아버지에 대한 작은 효도다. 아버지는 손자가 며칠 머무르는 동안 함께 낚시를 가신다. 지금껏 나와 함께 낚시를 하면서 그토록 말을 아끼던 아버지는 손자와의 시간에서는 수다쟁이가 되신다. 장난이 끊이지 않고 약 올리는 재미가 지나쳐 다투기까지도 하신다. 가만히 지켜보는 나는 ‘나 어릴 때 좀  그렇게 해주시지....’ 라는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친구들과 한창 놀 나이인 20살에 아빠가 되셨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이해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그때 표현이 서툴렀던 내리사랑을 오롯이 손자에게 모두 쏟고 계신다.

내년에 날이 풀리면 3대가 나란히 개울가에서서 견지낚시를 하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견지낚시를 가르쳐주던 아들의 나이만큼 손자가 자랐고 우리에겐 함께 소통할 수 있는 낚싯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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