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인도네시아] Wayang Museum
말레이시아를 여행하면서 그림자 연극에 사용하는 특별해 보이는 인형을 본 적이 있다. 이슬람 예술 박물관에서 접했기 때문에 이슬람 전통문화에서 사용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종교이기 때문에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겠지 하고 대충 넘겼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도 동일한 인형을 만났다. 같은 이슬람 문화권이기도 하고, 말레이시아 믈라카와 인도네시아 바타비아(現 자카르타)는 과거부터 해상 실크로드의 핵심 무역항이었으며, 스리위자야(Sriwijaya) 왕국, 마자파힛(Majapahit) 제국의 세력권이 말레이시아 반도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과 자바 섬 일대를 아우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사한 문화가 있을 수밖에 없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만 따로 모아 전시한 박물관이 자카르타 구 도심에 위치한 파타힐라 광장(Taman Fatahillah) 한편에 있다. 심지어 이 그림자 극은 2008년 유네스코에서 인도네시아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어로 와양(Wayang)이라 칭한다. 바타비아 시절의 영광과 해상 무역의 역사가 궁금해 찾았던 구 도심 지역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인상 깊은 기억을 남겨준 곳은 바로 와양 박물관(Wayang Museum)이었다.
✔️ 와양은 인도네시아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자 변화하는 역사로써 전 세계 인형극의 중요한 기원 중의 하나이다.
✔️ 명칭: Wayang Museum
✔️ 홈페이지: https://museumwayang.info/
✔️ 주소: https://maps.app.goo.gl/H1uQS4VkZ3V3Km5j7
그림자 혹은 환영(illusion)을 뜻하는 자바어 Bayang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와양은 단어 그 자체로는 그림자 극에 사용하는 인형을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와양을 이용한 그림자 극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10세기 이전 힌두교와 불교의 전래와 함께 중부 자바 지역에서 최초로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지역에서 출토된 907년 경 유물에서 와양을 공연하였다는 문구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최소 1,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예술이다. 스토리를 담은 극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와 '마하바라타(Mahabharata)'가 자바 지역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라마야나는 힌두교의 비슈누(Vishnu) 신이 아유디아 왕국의 왕자 라마(Rama)로 환생하면서 펼쳐지는 일대기로, 결국 권력자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스토리이다. 다음으로 마하바라타는 같은 왕조 형제들의 권력 투쟁 스토리로, 인간은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자바인들은 이를 지역 신앙과 통합하여 독자적 형태의 서사극으로 발전시켰고, 인간의 도덕적∙사회적 문제와 신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해석하면서 그림자 극으로 진화시켰다. 그러다 보니 와양은 단순한 오락적 기능이 아닌, 교육적∙종교적∙정치적 매체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림자 극을 조종하는 달랑(Dalang)은 이야기꾼이자 해설자를 넘어, 교육자, 성직자, 철학자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특히 마자파힛 시대(13~16세기)에 와양은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제도화되었고, 이후 이슬람이 확산되던 시기에는 우상 숭배를 금하는 종교적 제약을 피해 비인간적 형상으로 변형되면서 그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제국주의자들이 그랬듯이, 네덜란드 또한 자바 전통문화를 억압하였으나 역설적으로 제국주의의 부당함을 말하던 와양은 민족의 정체성과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와양을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유네스코도 이 역사와 정신을 인정하여 2008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 흔히 말하는 와양은 엄밀히 말하면 와양 쿨릿(Kulit)이다. 쿨릿은 자바어로 가죽을 뜻하며, 물소의 가죽을 얇게 다듬어 만든 인형으로 그림자 극을 공연한다. 그러나 이 외에도 지역적, 문화적 특성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하였는데, 크게 와양 쿨릿(Kulit), 와양 골렉(Golek), 와양 토펭(Topeng), 와양 웡(Wong)의 4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와양 쿨릿(Wayang Kulit)
와양의 시작이자 가장 전통적인 형태로, 중부 자바 지역의 요그야카르타, 수라카르타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상술했던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를 시각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종교적 목적도 있었고, 도덕적∙사회적 문제 및 인간 내면의 갈등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교육적 목적과 식민시대 제국주의적 권력을 비판하는 목적으로 기능했다.
와양 쿨릿은 소가죽을 여러 날 물에 담가 부드럽게 한 뒤 얇게 펴고 말리는 과정을 거치고, 아주 정밀한 천공으로 세밀하게 문양을 새기고 채색하여 만든다. 독특한 제작 방식과 형태 때문에 인형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와양 쿨릿은 지역에 따라, 어떤 스토리의 극을 공연하는지에 따라 그 모양이 다르다. 아래 이미지 중 위 세 가지는 지역에 따라 다른 형태의 와양이고, 아래 두 가지는 현대에 와서 새롭게 재창작된 와양이다. 와양 술루(Suluh)는 횃불 또는 등불이라는 의미로, 계몽의 도구를 상징하며, 와양 레볼루시(Revolusi)는 투쟁을 의미한다. 두 가지 모두 독립 당시인 1950년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독립 투쟁의 역사를 국민들에게 선전하기 위한 목적과 독립 직후 국민들을 계몽하기 위한 목적의 스토리를 창작하면서 만든 인형들이다.
와양 쿨릿은 전통음악인 가믈란(Gamulan) 반주에 맞춰 등불이 달린 하얀 천막 뒤에서 인형을 조종한다. 이 인형을 조종하면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달랑(Dalang)이라고 하는데, 특징적인 점은 단 한 명의 달랑이 모든 인형을 조종하고, 모든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다르게 변조하며 극을 이끈다고 한다. 즉 달랑이 그림자 극 전체를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이다. 그래서 이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상당히 존경받는 예술인이라고 한다.
2. 와양 골렉(Wayang Golek)
와양 골렉은 자바 서부인 순다(Sunda) 지역에서 발전한 인형극이다. 쿨릿이 평면 인형이라면 골렉은 나무조각으로 제작한 입체 인형이다. 그래서 인형의 얼굴도 쿨릿보다는 사실적이고 보다 사람의 형태에 가깝다. 와양 쿨릿이 과거 종교적∙교육적 기능부터 현대에 와서 정치적 스토리를 주로 다뤘다면, 와양 골렉은 풍자와 농담, 일상적 대화가 많고 시장이나 마을에서 공연을 해 보다 대중 친화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와양 박물관에는 라마야나의 서사 중 대표적인 9가지 장면을 재현해 와양 골렉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요그야카르타 크라톤 왕궁에서는 와양 골렉 공연을 우연찮게 접하기도 했다.
3. 와양 토펭(Wayang Topeng)
토펭은 가면을 의미하는 말로, 배우가 가면을 쓰고 춤과 연극을 결합한 공연 예술의 형태이다. 마자파힛 제국 시대 궁정 의식에서 유래해 주로 자바 동부 지역과 발리(Bali)에서 전승되었다고 한다. 가면은 신적인 존재나 조상의 영혼을 매개하는 상징물로 간주되어 주로 마을 공동체에서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거나, 농경의 풍요, 질병의 퇴치를 비는 의례로 주로 활용된다.
4. 와양 웡(Wayang Wong)
마지막으로 웡은 사람이란 의미로, 인간이 직접 와양의 인형 역할을 연기하는 공연을 말한다. 17세기 마타람 왕국 시대 궁정에서 탄생되었으며, 와양 쿨릿의 스토리, 음악, 대사 구조를 그대로 차용한다. 배우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아닌 와양 인형의 동작을 모방해 몸의 각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연기하고, 대사도 달랑이 직접 하기 때문에 배우는 목소리 연기가 없다. 요그야카르타에는 Wayang Wong Sriwedari Theatre가 있어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와양 박물관은 전 세계의 다양한 인형들을 전시하고 있다. 유사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의 와양 쿨릿은 물론이고, 전 세계 다양한 국가의 인형극에서 사용하고 있는 인형들, 즉 와양 골렉과 유사한 인형들이 많이 보인다. 박물관에서 수많은 인형들을 전시한 이유는 인도네시아가 인형극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실제로 박물관은 전 세계 인형극이 인도네시아로부터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스토리를 더한 와양 쿨릿 그림자 공연은 유네스코에서도 인정하듯이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이 매우 의미 있는 기원 중 하나임에 분명하지만, 와양 골렉 스타일의 목각 인형들까지 인도네시아가 원조인지는 잘 모르겠다. 돌아와서 자료를 찾아봤지만 기원에 대한 명확한 역사를 찾기는 어려웠고, 각 국가들마다 각자의 스타일이 원조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다. 역사의 진화 과정 속에서 인형극은 각 국가들마다 자연스럽게 개발되고 발전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국가가 그렇듯 전통문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와양 또한 젊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운 환경이고,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오프라인 공연도 크게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설극장의 유지, 온라인 공연 및 대형 라이브 공연 등으로 확대, 학교와 축제 연계로 관람채널은 다변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판소리, 농악, 탈춤 등 전통문화도 대중적 인기를 유지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나서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은 동일해 보인다. 그 목적도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같은 것이다.
와양은 1천 년을 넘게 유지해 온 살아 있는 기록물이자 공동체의 집단 기억이고, 사회적 변화에 맞춰 변형되어 오면서 도덕적∙사회적∙교육적 규범을 만들어 왔다. 인형 제작자, 악기 제작자, 공연자, 지역상인들에게는 중요한 경제적 가치였고, 마을 축제나 혼례, 종교의례에서 활용되며 지역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기능도 하였다. 전통에 대한 교육적 기능을 가진 것도 물론이다. 전통문화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왜 필요하고 왜 중요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된다.
Epilogue 01
요그야카르타에 위치한 소노부도요(Sonobudoyo) 박물관에서는 거의 매일 저녁 와양 공연이 열린다. 이 박물관은 와양뿐만 아니라 자바 전체의 문화를 다루는 곳이다 보니, 설마 와양 공연이 열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크라톤 왕궁에서 와양 골렉 공연은 보았지만, 와양 쿨릿 공연을 실제로 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박물관도 미리미리 정보를 파악하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와양 쿨릿은 매주 화요일 오후 8시에, 와양 웡은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오후 8시에, 와양 토펭은 매주 금, 토, 일요일 오후 8시에 공연이 열린다.
Museum Sonobudoyo https://maps.app.goo.gl/Qt1VSBTWwbn2ADKm7
Epilogue 02
전 세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전통 와양 유물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Wereldmuseum Amsterdam과 라이덴의 Wereldmuseum Leiden 등에 소장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 열강들의 피해를 본 것은 여느 국가들이든 다르지 않다.
Wereldmuseum Amsterdam https://maps.app.goo.gl/3mCKGHJTrXoRGRLF6
Wereldmuseum Leiden https://maps.app.goo.gl/8VT36zhYuf816WWh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