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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Oct 20. 2023

등짝 스매싱과 맞바꾼 소원 성취

나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

  이혼을 한 뒤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졌다. 더 이상 결혼하라는 따가운 공격을 받지 않아도 되니 천하무적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자신들이 닦달해 한 결혼 때문에 내가 이혼녀가 되었다는 이상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나를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부자연스러운 다정함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안쓰러움에서 비롯되는 연민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이 싫었다.

  물론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다 한들, 이혼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혼녀가 뭐 그렇게 별거라고, 하는 반항심도 들었다.

  엄마는 나에게 이제 자유롭게 살라고 했다. 그래, 이혼녀 그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발에 차이는 게 돌싱인데, 네 잘못도 아니니 떳떳하면 그만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말은 그리 하고 있어도, 엄마는 가슴에 영영 빠지지 않을 대못 하나가 박힌 것 같이 아픈 표정이었다.


  퇴근을 하고 헛헛한 기분으로 돌아온 밤, 아빠는 잠시 앉아보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의 요지는 맞선에 관한 것이었다. 42세, 대기업 영업팀 과장, 경기도 여주인지 어딘지에 개인 부동산 소유. 좋은 사람이니 만나 보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같이 화를 냈다. 아빠가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부터가 나의 분노 포인트였다. 그리고 이혼한 지 1년도 채 안된 시점에, 또다시 결혼이 화두에 오른 것이 몹시 불쾌했다. 그 길로 나는 편의점에서 맥주와 커피 땅콩을 사들고 집 근처 놀이터에 자리를 잡았다. 곧 죽을 사람처럼 맥주를 들이키며 화를 삭이고 있는데, 갑자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치할 거라며 집어든 게 고작 편의점에서 제일 비싼 맥주라니. 게다가 호프집도 아니고 놀이터에서 혼자 마시는 맥주라니.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있는데, 한참 뒤에 엄마가 나타나서 꺼져가던 분노에 다시금 불씨를 지폈다.

  엄마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여동생과 나를 비교하면서, 내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울었다. 나는 얼굴조차 모르는 '조상님'을 뵐 낯이 없다며, 내가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라고 했다. 나는 엄마의 그 말이 서운했다가, 화도 났다가, 이내 슬퍼졌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것들이 화려하고 좋은 것이 아닐지라도 나 하나 행복하면 된 것 아닌가 싶어 엄마에게 반문했지만, 엄마는 대답을 이어가지 못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울분을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딸이고 싶었다.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딸이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친척들에게 조차 내 이혼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떳떳하면 그만이라며. 왜 말과 행동이 다른 건데. 그런 부모님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남들 앞에서 당당히 이혼녀임을 밝히는 것이 잘못된 행동처럼 느껴졌다. 이제 진짜 자유롭게 살아보려 했더니, 또다시 결혼을 하라니.

  그 밤이 지나고 한 달 동안, 나는 부모님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 자취방을 구해 이사를 했다.


진정한 홀로서기의 시작이었던 사당동의 첫 자취방.

  종종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기는 했지만, 나는 굳이 엄마에게 먼저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내 목소리만 들었다 하면 엄마가 눈물을 터뜨려서, 그러면 나 또한 마음이 무거워져서 애써 멀리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아픈 손가락이 열과 성을 다해 엄마의 상처를 뒤적거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 무엇보다도, 내 상처가 건드려지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 꽤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을뿐더러,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그러다 겨우 만나게 된 것이 그였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마음이었다. 11년의 IT업계 경력을 뒤로하고 시작한 첫 창업의 실패로 무기력에 시달리던 나날들. 그는 빛 하나 들지 않는 캄캄한 동굴 속을 기어코 비집고 들어온 한 줄기의 봄볕 같았다.

  아일랜드의 골웨이 지역 출신이었던 그는, 남성적인 매력이 넘치거나 재치가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툭 치면 부러질 듯 가녀린 체구에, 너무 과묵해서 목소리를 기억하기도 힘든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끌렸던 이유는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일상에 스며든 그의 흔적 때문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 안, 점심을 먹으러 가는 잠깐의 틈, 그리고 다시 퇴근길의 지하철 안, 잠들기 전의 소소한 대화 뒤 굿나잇 인사까지. 그는 수시로 연락을 해왔다. 크게 인상 깊은 대화는 아니었지만 그와 나누는 일상의 이야기들이 좋았다.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새 생명이 찾아오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앞서했던 이야기와 연결된다. 아빠가 된다는 사실에 그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전부 다 잘 될 것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든든하게 안아주었다. 그랬던 그가 책임을 다 할 수 없다고 말을 바꿨을 때, 뇌정지가 온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같이 살 집을 알아보자고 했다가, 또다시 못하겠다며 도망가고 싶어 했다.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성과 감정이 마구 뒤엉켜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결단을 내릴 시점이 다가왔을 때, 그와 나는 부모가 되는 것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병원에 예약을 해두고 일주일 간 나는 매일을 지옥 한가운데서 불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무지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하루하루, 예약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의 고통이 더해져 차라리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물로 매일 밤을 지새우고 있는데, 그가 정말 아이를 포기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럴 리가. 나는 솔직한 나의 생각을 전했다.

  "나는 엄마가 되고 싶어. 아이를 포기하고 나면, 앞으로 사는 내내 후회하게 될 것 같아."

  그는 내 말에 오히려 안도했다. 그리고 부모의 책임을 함께 다해보자고 했다. 이미 그가 수차례 결정을 바꿨던 탓에, 나는 더 이상 그를 순수하게 믿을 수 없었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아빠가 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그에게, 나는 모르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나와 아이는 이 세상에 없는 거라고, 그렇게 믿고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라고.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를 과거 속으로 흘려보냈다.


  몇 달 후, 그에게서 한차례 연락이 오긴 했었다. 잘 지내고 있냐며, 뒤늦게서야 아빠가 되겠다는 다짐을 전한 그였지만 나는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와 아이에게 있어 그만큼 불안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차라리 그럴 바에야 혼자 키우는 한이 있더라도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마음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냉철해져야만 했다.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차가운 말을 내뱉고, 그대로 그의 연락처를 삭제해 버렸다. 이젠 정말 혼자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혼은 싫지만 엄마는 되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어김없이 날아오던 엄마의 등짝 스매싱과 소원을 맞바꾼 꼴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나는 더더욱 말뿐 아니라 생각까지 조심하게 되었다. 말이 씨가 되고, 생각하는 대로 행해지는 것은 정말이다. 그 산 증인이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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