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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Oct 20. 2023

나의 결혼 잔혹사

등 떠 밀려하는 결혼은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만 다섯 살이던 해의 12월 마지막 날,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다. 중년이 된 지금도 그날의 소란스러웠던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딸만 둘이던 아빠는, 막내가 아들이라는 이야기에 온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동네가 떠나가라 웃으며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내가 병원 로비의 초록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얌전히 기다리는 동안, 아빠는 엄청난 양의 동전을 쉴 새 없이 공중전화에 집어넣으며 아들을 얻은 기쁨을 자랑하기 바빴다. 둘째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 또 딸이라는 이유로 실망을 한 아빠는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할머니에게 전해 들었다. 그러니 아들의 탄생이 아빠에게 어떤 의미였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두 살 터울의 여동생과는 늘 투닥거리는 사이였지만, 이제 갓 태어나 이불속에서 꼬물거리는 남동생의 모습은 어린 나의 눈에도 고귀하게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또한 작은 아이에 불과했는데, 그때는 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던 것 같다. 정성스레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먹이고, 남동생을 등 뒤에 업고 다니던 나를 동네 어르신들은 '몽실언니'라고 불렀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부터 몸소 육아를 경험하며 아기를 좋아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몽실언니 (이미지 출처 : 소설 '몽실언니' 표지 캡쳐)


  성인이 되고 나서는 늘 엄마가 되고 싶었다. '결혼은 싫지만 아이는 갖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엄마는 내 등짝을 짝!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여동생은 스물다섯의 철 모르던 나이에 일찌감치 결혼을 했고, 이듬해에 엄마가 되었다. 나는 그런 여동생과는 정 반대의 길을 걸었다. 여동생의 결혼식 당일 새벽에 3년을 만나온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로도 수차례 연애와 이별을 반복했다. 내가 이별의 아픔으로 캄캄한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을 때면, 세 살이 된 조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서 연신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녀석에게는 그 사이 갓난쟁이 동생도 생겼을 때라,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서로의 처지에 동병상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금요일 저녁에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늘 두 조카가 집에 와있었는데, 피곤하긴 해도 아이들의 꺄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그렇게도 좋았다. 유독 나를 잘 따르던 큰 조카는 밤이면 늘 내 품에 안겨 잠이 들곤 했다.

  나에게는 독거노인으로 늙어 가다가 고독사하여 몇 달이 지난 뒤에 발견되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그런 마음을 몰래 감추고, 언젠가 큰 조카와 그런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모가 나중에 할머니 되면 너는 그때도 이모 보러 올 거야?"

  "당연하죠! 제 아기하고 같이 보러 갈게요!"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꾹 찍으며 굳게 약속을 했다. 복숭아나무 밑이 아니어서 그렇지, 도원결의에 버금가는 의리의 약속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나 또한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아주 잠깐 스쳐갔던 전 남자친구의 끈질긴 스토킹에 슬슬 지쳐갈 때 즈음이었다.(여담이지만, 그놈의 스토킹은 4년이나 이어졌다.) 아빠는 친구 아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며 본인이 더 신나 보였다. 아빠가 내민 사진 한 장에는 중매를 할 상대와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이 담겨 있었다. 먼지가 폴폴 쌓인 기억을 꺼내보니 어렴풋이 그가 생각이 날 것도 같았다.

  그렇게 오래전 가족 동반 여행에서 만났던 그와 나는 성인이 되어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양가 부모님까지 함께 자리를 해서 분위기가 흡사 상견례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의 착각이 아니었다. 첫 만남 자리에서 안방 공사 이야기가 오고 가더니, 양가 부모님의 주도 아래 3개월 후 그와 나는 결혼식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결혼이라는 것이 이렇게 빨리도 가능한 것이던가. 모든 것이 정신없고 분주하게, 그리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나는 마치 실에 달린 마리오네트처럼 그저 끌려가고만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미 연애에 있어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서른이 넘으니 온 가족과 친척들은 '결혼'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나를 공격했다. 그 단어는 때로는 국수로, 때로는 출산으로 다양하게 모습을 바꿔가며 나를 쿡쿡 찔러댔다. 이미 수차례 연애에 실패한 전력으로 마음이 갈가리 찢긴 내가 그 공격에 수비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리는 없었다. 차라리 조종당하는 인형이 되는 편이 오히려 마음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결혼에 내 의견 따위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막장 드라마 속 '여자 3' 정도의 배역에 캐스팅된 것과 다름없었다. 모든 것은 시어머니의 의견대로 조정되었고, 시부모님이 사용하던 안방은 신혼방이 되었으며, 주방 공사도 함께 진행됐다.


  이후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길게 쓰고 싶지 않다. 결론만을 이야기하자면, 결혼한 지 5개월 만에 나는 챙길 수 있는 모든 짐을 내 손으로 차에 싣고 그 집을 뛰쳐나왔다. 시어머니의 반복되는 가출을 시작으로, 어느 날에는 술을 마시고 집안 살림이며 술병이며 할 것 없이 때려 부순 일이 발단이 되었다. 뒷정리를 하다가 구석에서 발견한 가위에는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같은 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일주일 내내 시어머니를 만날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인지 알 길조차 없어 답답한 마음이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좁은 새장에 갇혀 날지 못하는 새가 된 심정이었다.


  친정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내내 울었다. 짐으로 뒷좌석이 가득 차 백미러도 이미 존재 의미를 잃어버린 뒤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늘은 맑았고, 길 또한 막힌 덕에 안전하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시아버지에게서는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야근으로 내가 늦는 날이면, 자다가도 잠옷 바람으로 나와서 며느리를 기다려주던 그런 시아버지였다. 며느리가 따라주는 막걸리 한 잔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웃던 시아버지에게는 죄송했지만, 그 상황에서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여행으로 잠시 집을 비워 부모님도 없던 빈 집에서 나는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아마, 이혼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일 없어 보였지만, 그 이면의 나는 감정적으로 위축이 되어 있었다. 시어머니의 친절함에는 늘 날이 서있었고, 시아버지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었지만, 남편은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장애가 있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면, 나에게도 변명거리가 있다. 아빠와 시아버지는 반 세기를 함께 한 친구였고, 부부동반 모임 또한 35년 넘게 지속해 왔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그래서 더욱 문제가 없을 것이라 믿었다. 남편의 행동에는 특이한 양상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 또한 그저 순수한 사람이라서 그렇겠거니, 생각했다. 신혼여행을 가서야 남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그것은 살면서 내가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시선이었다.


  집을 나온 뒤 몇 달이 지나도록 시댁에서는 이렇다 저렇다 연락조차 없었다. 초반에는 매일 전화를 하던 남편 또한 분가를 할 수 없다면 이혼을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뒤로 점점 연락이 뜸해졌다. 나의 의지는 확고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 살 바에야 차라리 자유로운 이혼녀가 나았다.

  한 차례 아버지들끼리 만난 자리에서, 아빠는 나에 대한 온갖 모욕을 들었다고 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이혼당해도 싸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당연했을 정도의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며, 나라는 사람은 그 안에서 날조되고 훼손되어 버렸다.

  결국 집을 나온 지 3개월 만에 나는 이혼신청서에 도장을 찍을 수 있었고, 반 세기를 이어온 아버지들의 우정도 끝내 깨져버렸다.


  내가 이혼녀가 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원래도 계획적인 인간은 아니지만, 이혼이라는 것은 내 인생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해보지 않아도 되는 경험이었지만 지금에 와 되돌아보면 그것이 또 그리 큰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오른쪽 문으로 나란히 입장해 두 분의 판사님과 멀찍이 마주 보고 앉는다. '이혼 의사에는 변동이 없으십니까?'라고 묻는 말에 '네'라고 대답하고 왼쪽 문으로 나가 각자 갈 길을 가면 그것으로 합의 이혼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Just 10 minutes’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는 10분만 주면 상대를 꼬실 수 있다는데, 이혼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Just 10 seconds’였다. 이렇게나 찰나의 시간에 법적인 이별이 가능하다니,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괜히 높은 것이 아니다.


  이후 이혼 신고를 위해 바로 구청으로 직행했고, 법원에서 봤던 이혼 부부들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다시 만났다.

  이혼 신고서 작성을 하고 있는 나에게 한 부부가 이렇게 작성하는 것이 맞냐고 물어보았다. 오지랖 넓게 도와주려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저도 이혼이 처음이라서요."

  이혼 신고서 접수 후 일주일이면 처리 완료된다는 안내를 받고 구청을 나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짜 집으로 향했다. 결혼 생활 5개월, 그리고 별거 3개월. 내 결혼 잔혹사는 그토록 허무하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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