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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Oct 20. 2023

너와 함께 한 두 번째 여름의 추억

너의 눈부신 나날들

  여동생과 두 조카와 함께, 부모님이 계신 영덕으로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다.

  출발하던 날은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짐은 한가득인데 아이까지 안고 가야 하니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아기띠를 하기에는 리안이가 너무 커버린 데다, 이미 처분하고 없어서 머리를 써야 했다. 리안이는 포대기로 업어주는 것을 좋아했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포대기를 아기띠처럼 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세상에는 어쩜 이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지. 덕분에 리안이를 안은 채로 여행 트렁크를 끌고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때때로 차가 없는 것이 아쉽기는 했어도, 이가 없다 해서 잇몸으로 못 살 법도 없었다.


  서울역에서 여동생을 만나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포항행 KTX에 올랐다. 한 차례 기차를 타 본 경험이 있던 리안이는 익숙한 듯 의젓하게 간식도 먹고 낮잠도 자며 여유롭게 기차 여행을 즐겼다. 역에 마중 나와 있던 아빠는 반갑게 우리들을 맞아주었다. 아빠 차를 타고 도착했더니 엄마는 맛있는 음식을 한가득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 베이비시터. 능숙한 손길로 야무지게 기저귀도 척척 갈아준다.

  둘째 조카는 유난히 리안이를 예뻐한다. 리안이와 함께 기차를 탈 생각에 설레서 새벽까지 잠을 못 잤다던 녀석은, 영덕에 머무르는 동안 리안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기느라 바빴다. 둘째 조카는 사촌동생인 리안이의 기저귀도 척척 갈아주고, 밥을 먹이고, 포대기로 업어서 재우는 일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이제 똥기저귀만 갈 수 있으면 된다며, 그 또한 기꺼이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둘째 조카의 그런 모습에 나는 진심으로 감탄을 했다. 이만한 베이비시터가 또 어디 있을까. 나는 리안이를 완벽 케어한 둘째 조카에게 나중에 꼭 돌봄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정말 그럴 생각이다.

인생 첫 물놀이는 눈 깜짝할 새에 끝났지만, 사진은 예쁘게 남았다.

  아빠는 만물도깨비경매장의 단골이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썩 내켜하지는 않지만, 아빠의 소소한 재미거리인 것을 알기에 그냥 눈감아주는 것 같다. 아빠는 손주들을 위해 도깨비경매장에서 싸게 샀다며 창고 구석에서 큰 박스 하나를 꺼내왔다. 뿌듯한 표정으로 아빠가 내민 것은 튜브 보트였다. 신이 난 조카들은 이내 박스에서 부품들을 꺼내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서로서로 돌아가며 1시간을 고군분투한 끝에, 드디어 튜브 보트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보트를 들고 이끄는 첫째 조카를 따라 래시가드로 갈아입은 리안이를 안고 바닷가로 향했다. 인생 처음으로 바닷물에 발을 담근 리안이는 질퍽한 모래의 촉감을 느껴보다가, 포슬포슬한 모래가 있는 자리로 옮겨 가져온 장난감 삽으로 바닥을 파며 놀았다. 리안이는 졸려워하면서도 보트 위의 형아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내심 같이 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함께 태워줬더니 신기한 듯 미소를 짓다가 얼마 안 가 돌아가자며 손짓을 했다. 결국 리안이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품에 안겨 그대로 잠이 들었고, 그렇게 인생의 첫 바닷가 물놀이는 10분 만에 끝이 났다.


외조부모님과의 즐거운 여름날.

  다음날에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리안이가 옆에 없었다. 외할머니를 따라 텃밭에 나갔다는 말에 부스스한 채로 밖에 나가봤더니, 외할머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으며 고추며 토마토를 들여다보고 있는 리안이가 보였다. 조그마한 발로 열심히 걷는 리안이와 그 옆에서 흐뭇하게 웃는 엄마를 사진으로 남겼다. 이 풍경도 추억이 되어 오래도록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외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그림을 그리며 꺄륵꺄륵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는 이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도 듣기 좋았다. 영덕에 머물던 일주일 동안, 리안이의 개인기도 부쩍 늘었다. 예쁜 짓, 이라고 하면 눈을 찡긋 감기도 하고, 아이 예쁘다,라고 하면 자기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아이가 할 줄 아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한 생명의 성장과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점에 감사했다. 내가 만약 그때 아이를 포기했다면 지금의 이 눈부신 순간들을 누릴 수 있었을까. 이토록 반짝이는 작은 사람의 엄마이기에 비로소 손에 행복을 잡을 수 있었다.

  돌아보면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어쩌면 진실하게 사랑을 나눌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껏 사랑을 쏟아부어도 그 마음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관계. 그리고 아무런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줄 관계. 그것은 남녀 사이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서 채워지지 않던 결핍을, 아이를 양육하면서 채워갈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결혼은 싫지만 엄마는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불혹의 나이에도 어딘가에는 있을 산타 할아버지를 믿는 나는, 이미 너무 큰 선물을 받아서 더 이상 다른 선물을 바랄 수도 없게 되었다. 그저 지금의 행복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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