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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Oct 20. 2023

첫 기차 여행을 하던 날

94%의 걱정은 쓸데가 없다더라

  서울에서 자라 연고도 없는 영덕으로 내려가신 부모님을, 리안이가 2개월 되던 때 처음으로 만나러 갔었다. 1년 넘게 연락두절 상태로 지내다가, 동생들의 조심스러운 권유로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장거리 여행을 하기에는 아이가 너무 어려서 괜찮을까 싶었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가는 동안 리안이는 잠에 푹 빠져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에 반가움보다도 어색함이 흘렀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가족이라는 관계에 놓인 우리는 감정의 골이 깊을지언정 함께 이뤄온 역사로 끈끈하게 엮여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엄마는 막내 손주를 품 안에 가만히 안아보았다. 눈물을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엄마의 마음을 나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엄마의 아픈 손가락.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릿 아픈 딸이 자신과 같은 엄마가 되었다니. 비록 한 짝뿐인 짚신이어도, 꿈을 이뤘으니 되었다 싶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되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 뒤로 부모님이 서울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내려가기 전에 몇 번을 더 뵈었다. 리안이를 만날 때마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부모님을 보며, 나는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말했다. 부모님은 그 말에 부정의 말 대신 웃음으로 답했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갖은 애교를 부리는 리안이를 보는 내 눈에서도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을 지나 본격적인 겨울로 넘어가던 11월이었다. 5박 6일로 리안이와 영덕에 가기로 했다. 단둘이 기차를 타는 것은 처음이라 내 머릿속은 온통 짐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24인치의 여행용 캐리어는 이미 기저귀와 겨울옷만으로도 꽉 찼다. 가면서 먹일 간식과 물, 이유식은 기저귀 가방에 따로 챙겨 들고, 아기띠로 리안이를 안았다. 손과 어깨에 맨 짐에 아이의 무게가 더해지니 걷기조차 힘들었다. 2만 원이 넘는 비용이지만, 짐을 실어주는 서비스가 가능한 택시를 호출했다. 그 돈을 아끼다가는 내가 먼저 짐에 압사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사님 덕분에 서울역까지는 편안하게 도착을 했는데, 이후부터는 고행길의 시작이었다. 아이를 안고 낑낑 짐을 끌며 탑승 플랫폼에서 대기를 했다. 기다리던 열차가 도착하고, 먼저 탑승을 하던 승객의 도움으로 무사히 짐을 싣고 자리에 앉았다.

호젓하던 차창 밖 풍경과, 그 풍경을 바라보던 작은 사람.

  리안이는 처음 타는 기차가 신기했는지, 폭풍 옹알이를 하며 빠르게 흘러가는 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꺄르륵 웃기도 하고, 이유식과 간식도 뚝딱 해치웠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해서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지만, 낯을 가리지 않는 리안이 덕에 오히려 마음이 편한 것도 있었다.

  낮잠에서 깨어 나서는, 답답했는지 자꾸 밖으로 나가자는 리안이를 데리고 기차칸 사이의 통로에서 짧은 걸음으로 서성거렸다.

  그 사이 도착한 포항역. 친절한 분이 캐리어를 내려주시고 나자마자 한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서울역에서부터 나를 봤다며, 대신 짐을 끌어주시겠다 하셨다.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와 함께 무궁화호 열차를 갈아타러 가는데, 포항이 댁이라는 아주머니가 같이 내려가서 무궁화호 열차에 캐리어를 실어주기까지 하셨다. 나는 연거푸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세상은 아직 따뜻한 사람들이 넘쳐 나는구나. 훈훈하게 덥혀진 마음을 안고 영덕으로 향했다.


  무궁화호 열차에서도 그런 친절은 이어졌다. 무궁화호 열차는 이용객이 적어 서둘러 내려야 했는데, 한 아저씨가 내 짐을 보고 얼른 캐리어를 내려주셨다. 살면서 받을 친절을 하루에 다 몰아 받은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가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아빠가 리안이와 나를 반겨주었다. 외할아버지를 알아본 리안이도 옹알이로 인사를 했다.

  엄마는 도착 시간에 맞춰 쪄놓은 대게를 한가득 내왔다. 짐은 채 풀지도 못하고, 리안이를 뒤로 업고 대게를 뜯기 시작했다.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열매 같던 리안이는, 외할머니가 발라주는 대게살을 쪽쪽 소리가 나게 받아먹었다. 그 재미있던 풍경을 아빠가 사진으로 남겨주었는데, 종종 열어볼 때마다 미소가 지어진다.


  강구항의 유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사이 그곳의 상인들과 친목을 다져놓은 아빠 덕분에, 귀한 해산물을 배가 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하루는 저녁에 방영하는 TV 프로그램에 홍가리비가 나왔는데, 다음날 점심 상에 그대로 올라왔다. 가리비 껍데기 종지에 초장을 가득 담아 콕콕 찍어 먹던 그 맛을 생각하면 아직도 군침이 돈다. 친정에만 다녀오면 체중이 3kg씩 불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덕에서의 먹부림 인증샷들.

   5박 6일의 일정이 굉장히 길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간이 어찌나 빠르던지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외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던 귀여운 리안이의 모습과, 그런 리안이를 눈에 담기 바빴던 부모님의 모습만이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또한 아이와의 첫 기차여행에 잔뜩 긴장하며 걱정했던 내가 조금은 민망해졌다. 세상 94%의 걱정은 쓸데없다는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삶의 지혜를 깨우친 자임에는 분명하다. 살면서 별의별 걱정이 다 찾아와도, 그때마다 잘 끊어내고 6%의 걱정에만 집중하며 잘 헤쳐나가 보기로 하자. 나도,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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