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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Oct 20. 2023

두 번째 생일을 축하해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말괄량이 삐삐 케이크

  리안이는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였다. 또래 친구들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뽀로로인 경우가 대다수인데, 리안이의 최애 프로그램은 ‘말괄량이 삐삐’였다. 짝짝이 스타킹을 신고 주근깨에 빨간 머리를 한 그 삐삐가 맞다. 1969년 스웨덴에서 제작된 TV 프로그램은 반세기를 훌쩍 넘어 만 1세인 리안이의 마음에 꽂혀버렸다. 내가 어린 시절 보던 추억 속 삐삐 롱스타킹을 아이와 함께 보고 있으니 말할 수 없이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게 언어 폭발기에 들어서기도 전에 리안이는 ‘삐삐’라는 이름을 먼저 기억했다.


  첫 번째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두 번째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린이집 생일파티에 친구들과 나눠먹을 케이크를 보내야 했다. 대차게 말아먹은 사업일지언정 (구) 디저트샵 사장님의 자존심에 차마 케이크를 사서 보낼 수는 없었다.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 보내기로 결심하고 리안이에게 어떤 케이크가 갖고 싶은지 물었다. 리안이는 정확하고 분명하게 ‘삐삐’라고 대답했다. 한결같은 그 사랑에 부응하는 마음으로, 작은 사람의 두 번째 생일 케이크이자 엄마가 만들어주는 첫 번째 생일 케이크는 말괄량이 삐삐로 데커레이션을 하기로 했다.


  리안이가 좋아하는 딸기에 잘 어울리는 초코맛 제노와즈 시트. 작업성과 맛,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스위스 버터크림으로 아이싱을 할 계획이었다. 우선, 기껏 부풀려놓은 반죽이 꺼질세라 가루 재료를 넣어 신속하게 잘 섞어주고, 아기 엉덩이같이 퐁실퐁실한 케이크 시트를 구워냈다. 딸기는 얇고 일정한 두께로 썰어 물기를 빼두고, 달걀흰자와 설탕을 중탕하여 60도로 올려 만든 스위스 머랭에 버터를 넣어 크림을 만들었다. 케이크 시트에 바를 시럽을 끓여 식혀둔 뒤 다음 작업으로 넘어갈 차례.


리안이의 최애, '삐삐 롱스타킹' 아이싱 쿠키와 친구들에게 나눠준 진저브레드맨 쿠키.

  여기서부터는 집중이 필요했다. 자다가도 엄마가 옆에 없으면 종종 깨는 리안이었으므로, 깊이 잠든 12시 이후에 아이싱쿠키 작업을 시작했다. 낮에 미리 구워둔 진저브레드맨과 별모양 쿠키, 같은 반죽으로 만든 삐삐 쿠키를 조심조심 작업방으로 옮겼다. 데커레이션의 꽃인 로열아이싱에 식용 색소를 섞어 다양한 색들을 만들었다. 몰입의 순간으로 빠져들기도 전에 뒤척이며 엄마를 찾는 소리에, 안방과 작업방을 오가며 작업을 하다 보니 시계는 어느덧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포장과 마무리는 아침의 할 일로 미뤄두고 깊은 새벽이 되어서야 리안이가 떠난 꿈나라로 출발했다.


  피곤한 얼굴로 일어나 아침밥을 먹이고 서둘러 리안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생일파티가 시작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반. 서둘러야 했다. 잘 마른 아이싱쿠키 위에 세심한 터치로 생명력을 불어넣고, 전날 미리 아이싱 해둔 베이스 케이크에 알록달록한 색을 더해주었다. 쿠키를 꽂아 마무리를 하고 나니 생일파티 시간이 되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친구들에게 나눠줄 쿠키를 포장하고, 케이크를 박스에 담아 전속력으로 '걸었다'. 경보를 제대로 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날 나의 걸음이 경보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담임 선생님에게 무사히 케이크를 건네어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발걸음은 기쁨 그 이상의 것이었다. 아이의 특별한 날에 정성을 담은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엄마로서도 성취감을 느끼게 했다.

  오후가 되어 담임 선생님이 보내준 알림장의 사진에는 해맑은 미소로 케이크를 바라보는 리안이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리안이는 진심으로 좋아하며 케이크 앞에서 침까지 뚝뚝 흘렸다고 했다. 케이크 위에 리안이의 나이인 숫자 '2'도 아이싱 쿠키로 만들어 꽂아줬는데, 그 숫자를 보며 지난 2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깨질까 싶게 작고 소중했던 꼬물이가 커서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하다니. 사진을 몇 번이고 다시 보며, 베이킹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리안이의 생일 파티가 끝나고 근 한 달간, 원장님을 비롯한 선생님들은 하원할 때마다 케이크 이야기를 하셨다. 그런 케이크는 난생처음 봤다며, 직접 만들었다는 말에 놀라셨다고 했다. 아무래도 숨겨진 실력을 제대로 발휘한 것 같았다.


  생일 당일 저녁, 하원한 리안이는 셀프 이벤트로 TV를 부쉈다. 안방에서 조용히 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우당탕탕 하는 소리에 놀라 뛰어갔더니 선에 연결된 TV가 아슬아슬하게 겨우 매달려 있었다. 그 아래서 기어 나오는 리안이를 보고 괜찮은지 상태를 살폈다. 멀쩡한 아이와 달리 TV는 오른쪽 화면이 서랍장 모서리에 찍혀 장렬히 전사했다. 부모님과 영상 통화를 하며 그 황당한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감사하게도 아빠는 '말괄량이 삐삐'를 당분간 보지 못할 손주 생각에 서둘러 TV를 주문해 주었다. 그렇게 리안이의 두 번째 생일 기념 셀프 이벤트는 새로운 TV를 얻은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이가 새해를 하루 반 앞두고 태어난 것이 나는 못내 아쉬웠다. 연 초에 태어난 아이들은 성장에 있어서도 월등히 빠르니, 1월 10일 세상에 나올 예정이었던 아이가 서둘러 나온 것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욕심이었다. 리안이는 반에서 가장 막내였지만, 한 해가 지나자 친구들과 키가 비슷해졌다. 해가 바뀌고 나서는 언어 능력도, 기저귀를 뗀 것도 친구들보다 빨라졌다. 리안이의 성장 속도는 마치 달리기 후발 주자가 전력으로 질주하여 어느새 선발 주자를 따라잡는 것과 같았다.

  모든 것은 내가 걱정한다고 될 일도, 구태여 걱정을 할 일도 아니었다. 아이의 속도에 맞춰 늦다면 늦는 대로, 빠르면 빠른 대로 기다리고 따라가 주면 되는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잡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리안이를 보면서 조급했던 엄마였음을 반성한다.


  엄마는 늘 '너랑 똑 닮은 자식'을 낳아서 키워보라며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럼 나는 왜 악담을 하냐고 맞받아치는 것으로 응수했다. 내가 정말 나와 똑같은 자식을 낳음으로, 엄마의 입버릇은 현실이 됨과 동시에 나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리안이의 두 살 생일을 앞둔 어느 날 엄마가 그랬다.

  "엄마가 너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절대 그렇게 못했어. 우리 딸 대단해. 그렇게까지 키우느라 고생했어."

  그토록 듣고 싶던 인정의 말을, 엄마가 되고 나서야 드디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아이는 더욱 특별한 존재이자, 치유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스승인 아이의 가르침으로 나 또한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굳세고 꿋꿋하게 앞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아이로 인해 성장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음에, 매일이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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