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단 둘이 여행을 떠나다
게스트하우스 숙박권이 생긴 것을 핑계 삼아 엄마와 처음으로 단둘이 초여름의 제주 여행을 하게 되었다. 말을 꺼내자마자 흔쾌히 그래!라고 대답을 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엄마는 미운 정인지 고운 정인지 아빠의 끼니를 이유로 잠시 주저했지만, 1시간도 안돼 결국 내 제안에 긍정의 답을 주었다.
첫 행선지로 선택한 보롬왓은 라벤더가 피어 보랏빛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라벤더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 바빴다. 그러나 엄마와 나는 주인공인 라벤더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바닥에 핀 작은 들꽃에 더 마음을 빼앗겼다. 야생화를 좋아하는 엄마는 어떤 꽃의 이름을 물어도 척척 대답해 냈다. 사람들 발에 밟힐세라 곱게 어루만지던 엄마의 손길을 꽃들도 느꼈을 거라 믿는다.
엄마는 보롬왓 입구에서 판매하던 라벤더 한 다발을 선물해 줬다. 여행을 하는 동안 차 안에는 라벤더 향이 가득했는데, 그 꽃은 내 방 침대 맡에 걸린 지 한 달이 지나도록 향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래서 라벤더향을 맡으면 아직도 엄마와 함께 했던 그 여름의 제주도가 떠오른다.
점심 식사도 할 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로 향했다. 김영갑 갤러리 바로 근처에 위치한 '카페 오름'은 제주에 가면 항상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여자 사장님과, 훌륭한 셰프인 남자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카페 오름은 6월의 제주답게 정원 가득 수국이 피어 있었다.
사장님은 늘 혼자이던 내가 엄마를 모시고 오자 더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시그니처 메뉴인 새우 크림 파스타와 돈가스를 배부르게 먹고, 또 보자는 인사를 뒤로한 채 엄마와 주차를 해둔 갤러리로 돌아갔다.
김영갑 갤러리 또한 내가 늘 빼먹지 않고 들르는 곳이었는데, 엄마는 그곳 또한 마음에 들어 했다. 천천히 갤러리를 둘러보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좀 더 일찍 엄마와 여행을 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와 반대로 이제라도 그리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게도 여겨졌다.
첫날은 숙박권을 받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기로 했다. 빈티지한 무드가 가득한 곳에서 엄마와 나는 두런두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살면서 엄마와 그렇게 많은 대화를 한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더욱 아쉬웠던 기억이다.
엄마는 창에 걸린 자수 커튼을 만지작거리며 정성스러운 공간이 참 예쁘다고 천천히 눈에 담았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나 또한 눈에 담았다. 언젠가 엄마를 생각하면 오늘이 가장 먼저 떠오르도록, 소중한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졌다.
다음 날은 엄마가 가고 싶어 했던 여미지 식물원으로 향했다. 온갖 식물들이 가득했던 그곳은 엄마에게 놀이터와도 같았다. 눈을 바삐 움직이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난다. 오후가 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서, 엄마와 중문시장에 들러 족발과 맥주를 사서 호텔로 돌아갔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던 맥주가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다. 2박 3일의 짧은 여행은 어느덧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혼자서 방랑하던 제주도의 이곳저곳을 엄마와 함께 했던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여행을 하는 내내 나는 놀랍도록 엄마의 취향과 닮아 있음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특별한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나의 보물지도를 공유하며 서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세월의 풍파에도 마음 안에 소녀 하나를 품고 있는 엄마와, 그 엄마를 닮아가는 나. 우리는 초여름의 제주 안에서 여전히 나이 들지 않는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