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어디든, 한 발짝만 내딛으면 돼
사진전 오픈이 다음 주로 다가왔다. 전시를 준비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3만 장이 넘는 사진 중에서 프린트할 것을 고르고, 메이크업하듯 보정을 거쳐 프린팅을 하는 과정은 사진을 대하는 나의 자세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툭툭 스케치하듯 찍던 것과 달리 빛을 세심히 관찰하고, 프레이밍에도 좀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필름 사진을 접은 이후에는 데이터화되어 모니터 안에만 갇혀있던 사진들을 대형 프린트 실물로 보니 느낌이 또 색달랐다. 혼자 찍어왔던 사진을 공개하게 된 것도 새로운 출발선에 선 것 같아 설레는 마음이다.
최근에는 과거 디저트샵을 오픈하며 마련했던 스메그 오븐을 쌀베이킹 공방을 운영하는 여동생에게 넘겼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던 베이킹에 대한 미련을 드디어 놓아줄 수 있게 된 것 같아 후련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섭섭함도 있다. 집에 돌아와 오븐이 없어진 것을 본 아이는 '엄마, 그럼 내 빵은? 내 레몬케이크는?'이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필요할 때면 언제든 와서 사용하라는 여동생의 배려 덕에 그나마 조금은 위안이 된다.
미팅이 있어 외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충무로의 카메라샵에 들렀다. 사진전을 준비하면서 내내 마음에 두었던 필름카메라를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오래전에 Rolleicord V라는 이안리플렉스 카메라를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중형 포맷의 느낌이 참 좋았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35mm 필름에서는 느낄 수 없던 특유의 공간감에 감탄을 하며 봤던 기억이 있어 다시 중형카메라를 사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가려고 했던 남대문의 카메라샵에 어젯밤까지만 해도 매물로 올라와있던 모델은 그 사이 판매가 되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들르게 된 충무로였다. 반갑게 맞이해 주는 사장님과 인사를 하고, 차선으로 생각하던 모델을 말씀드렸더니 중형카메라는 매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셨다. 중형카메라는 보통 위에서 내려다보는 웨이스트 레벨 파인더를 사용하는데, 인스타그램 릴스에서 그 장면을 찍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더욱 구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결국 구매하게 된 것은 오래 전의 그 Rolleicord보다 상위 모델인 Rolleiflex 3.5A였다. 좋아하는 렌즈인 Planar가 달려 있는 모델도 있었지만, 가격은 둘째치고 무게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생산연도가 1949년에서 1951년으로 추정되니 대략 계산해도 73년이나 된 어르신이다. 덧붙이자면 55년생인 우리 아빠보다 형님이다. 카메라샵 사장님이 바로 맞은편 가게에서 필름을 구매할 수 있다고 알려주셔서 중형 필름 7 롤을 사서 돌아왔다. 왜 7 롤이냐고 묻는다면 오랜만에 필름카메라로의 복귀에 행운이 따랐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하겠다.
가끔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었다. 나는 죽어라고 길을 찾는데, 안갯속을 헤매는 것 마냥 길이 보이지 않던 날들이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길을 따라 작은 희망을 가지고 발을 내딛여도 그 끝이 낭떠러지인 경우도 있었다. 그때는 내가 믿는 신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도를 빙자한 투정을 그렇게도 부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길은 언제나 그대로 있었다. 힘을 꼭 주고 찾지 않아도 때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어느 곳으로든 한 발짝만 내딛으면 그것이 곧 길이었다. 어느 방향으로든, 내 길이 맞으면 헤매다가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는 더 이상 미래가 불안하지 않다. 틀리더라도 괜찮다. 결국에는 내가 있어야 할 다음 장에 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조만간 73세의 어르신을 모시고 동네 곳곳을 좀 다녀봐야겠다. 함께 호흡하는 기분으로 시선을 맞춰가며 또 어떤 장면들을 담게 될까. 기대되는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