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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베카 Apr 16. 2024

순종적인 엄마의 대리자

원치 않은 역할




 나는 어린 시절의 일기장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다른 건 다 버릴 수 있었는데 매번 ‘일기장’만은 버리지를 못했다. 연재를 하는 과정은 상처를 꺼내보고 또, 헤집어 보기도 하는 과정과 같았다. 꽁꽁 싸매어 놓은 일기장을 찾아 읽어본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나는 지난 일기장을 보면서 내심 놀랐다. 내가 그렇게나 오랫동안 동생을 귀여워하고 예뻐했는지 잊고 있었다.

 내게 동생은 어느 순간부터 ‘순종적인 장녀’에게 내리는 엄마의 ‘오더’ 같은 거였다. 그게 매일 강조되고 반복되다 보니 엄청난 무게감으로 날 질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 모든 게 당연한 ‘장녀의 책임’이라고 했고 ‘의무’라고 했다. 그 의견에 의심 따위 품어본 적도 없었다. 순종적이지 못하면 폭언이 쏟아졌으니까 의심을 피했다가 옳은 표현일 거다. 그래서 내가 내 상태를 알아차렸을 때는 그 ‘오더’가 시작된 당시 엄마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선 후였다. 매번 폭언 속에는 나 같은 딸을 낳아 고생을 해야 하며, 필시 불행할 거라는 암시가 있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그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랑과 아이들은 사려 깊고 다정하다. 매일밤 ‘안녕히 주무세요. 좋은 꿈 꾸세요. 사랑해요’라고 말하며 엄마에게 뽀뽀를 해준다. 그럼 나도 애정 어린 밤인사를 건넨다. 아침에 제일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신랑도 항상 애정 어린 눈빛과 다정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이런 일상에서 내가 굳이 상처를 꺼내어 풀어보는 것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이다. 지금은 회복기이지만 지난 몇 년간 심한 우울과 불안증세로 무기력한 시간을 보냈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시기여서 더 내면으로 침잠되어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용기 내어 나의 의지로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속에 쌓여있는 이야기를 해보는 게 도움이 될 거 같다는 조언이 있었다. 몇 달이 지난 후에 이렇게 이루어지리라고는 예상 못했지만 말이다.

 병원에 가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학생부터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도 풀어야 할 실타래가 하나씩 있나 보다. 그 꼬임이나 색은 각기 다르겠지만 말이다. 지금 내가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들은 내 가슴에 엉켜있는 실타래이다. 그중 동생에 관한 실타래를 오늘 풀어보려 한다.


 중학교시절 학원을 가는 마을버스 안에서 이제 막 초등학교를 파하고 나오는 동생을 본 적이 있었다. 친구들과 무리 지어 있었지만 친구의 가방과 실내화주머니가 동생에게 들려있는 점이 못마땅했었다. 나중에 집에서 그 일은 동생에게 질문을 시작으로 한숨을 거쳐 잔소리로 마무리됐었다. 내가 뭐라고. 차라리 용돈을 털어서 동생과 친구들에게 햄버거나 사줬다면 동생과 더 나은 관계가 되었을까.


 동생이 중학교를 다니고부터는 같이 마을버스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데도 동생은 나를 피했다. 친구들이 나를 보고 동생이냐고 묻는 것이 맘에 안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컸던 동생옆에 있던 내가 동생처럼 보였었나 보다. 오히려 고등학생인 내게 굴욕적 이건만 왜 동생은 나에게 불편한 기색을 비치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하루는 중학생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마을 버스정류장에 서있던 나에게 삥을 뜯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얌전한 외형에 반해 나는 불의에 호전적인 편이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생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당황하던 아이들 중 하나가 내 교복을 보고 ‘고등학생 언니야’라며 친구들을 말렸다. 이 우스운 상황에 내가 내적 콧바람을 얼마나 크게 불었는지 말하지 않겠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었으니 꿈꾸던 동생과의 오붓한 등하굣길은 한 번도 성사된 적이 없었다.


 동생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의 본격적인 지방행으로 집을 팔아, 고시원 2인실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순종적인 엄마의 대리인’ 역할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동생은 온라인 게임의 길드원끼리의 우정에 빠져들었고,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그럼에도 동생과 함께하고픈 마음에 길드정모에 한번 나가본 적이 있다. 근데 웬 음침한 카페에서 아저씨들과 신나게 게임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생이 내 눈에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그 뒤로 동생과 친구처럼 다니기는 어렵겠구나 하고 미련을 접었다.


 동생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더 요란한 인간관계로 집안에 이슈가 생겼었다. 지방캠퍼스에 입학한 동생은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엄마가 입학선물로 동생에게 금귀걸이와 목걸이를 세트로 사주는 등 요란해 보일 정도로 화목해 보였다. 사실 내가 아르바이트비로 금귀걸이를 처음 한 날. 나는 엄마에게 귀걸이가 날아갈 정도로 따귀를 맞은 기억이 있어 부러움에 그리 보였을지도 모른다. 20살이 넘어서도 화장을 하면 지독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나에 비해 엄마의 무조건적인 호의를 받는 동생의 모습에 질투가 났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에서 한숨소리로 시작된 ‘오더’가 떨어졌다. 


 대학교 강사에게 꼬여 피라미드 다단계에 빠진 동생이 엄마도 같이 교육을 가자며 못 살게 굴더니 급기야는 가출을 했다는 것이었다. 내게 그 강사의 연락처를 알려주며 동생을 말려 제정신을 차리게 하라고 했다. 지역도 다른데 연락처 하나로 내게 가출한 동생을 집으로 보낼 의무가 생긴 것이다.

 내가 첫 취업을 해서 들어준 펀드통장을 들고 가출한 데다 명의가 자기 꺼니 돈을 언니가 넣었어도 내 돈이니까 상관하지 말라는 동생을 무슨 수로 다단계에서 빼온단 말인가. 하지만 ‘오더’가 떨어진 이상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무조건 해야만 하는 일일뿐. 거부하면 나는 가족 따위는 필요 없는 막돼먹은 사람이 되는 거였으니 결국 나는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야 했고, 전화를 건 이유를 설명해야 했으며 급기야는 다단계강사의 험한 언사에 법적 운운까지 하며 싸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엄마대신 이게 정말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을까. 온갖 험한 소리를 들은 나는 그 후 며칠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더’는 끝나지 않았다. 

 더 심해지기만 할 뿐..






#가족이란이름으로

#가해지는폭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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