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J야 너에게 추억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랜 친구들과 술을 한잔하며 오가는 이야기 일 수도 있겠다. 그게 아니면 자기 전에 이따금씩 피식하게 되는 즐거운 기억일 수도 있겠다. 추억의 뜻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이라고 하네. 잠깐, 그럼 즐겁지 않은 지나간 일도 추억이란 얘기인 건가? 보통 추억하다는 동사는 좋았던 일에만 썼었는데, 부끄럽고 창피했던 기억도 추억해야만 하는 건지 궁금하네. 넌 어떤 일들을 추억하는지 궁금하다.
이젠 완연한 가을 날씨가 되어버린 것 같네. 아침, 저녁으론 춥고 낮엔 더운 걸 보면 말이야. 더위를 많이 타는 난 꼭 반팔을 입고 겉옷을 챙겨야 하는데, 이게 참 귀찮은 일이다. 좀 열심히 하루를 산 날엔 겉옷도 필요 없어지거든. 아무튼, 가을이 되니까 하늘이 정말 예쁘더라. 최근에 그런 하늘을 봤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색을 품고 있더라. 그래서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나, 달리기를 하러 가는 길에나 자꾸만 하늘에 카메라 렌즈를 갔다 대게 된다. 하늘에 닿으려면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말이야. 그런데 안양천에 들어서며 봤던 그 아름다운 빛깔과 풍경은 생각보다 사진에 온전히 담기지 않더라. 그 바람과 온도와 습기를 사진은 담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래도 사진은 사진 나름의 빛깔을 담고 있더라. 아마 1년이 지나면 잊힐 그때의 온도는, 사진으로만 남겠지.
문득 추억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눈으로 본 안양천의 하늘이 100번은 더 아름답고 찬란하지만,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 내가 간직할 수 있는 건 사진뿐인 것처럼, 과거에 겪었던 일은 그 당시엔 정말 생경하고 직설적으로 날 즐겁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못내 그 색도 좀 바래고, 향도 좀 옅어지는 거지. 그렇게 해서 우리의 평생을 추억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 생각해 보면, 갤러리에 담긴 하늘 사진들이 모두 그때의 온도와 바람과 색깔을 다 머금고 있어서 내가 직접 경험했던 그 하늘을 온전히 담고 있다면 아마 내 사진첩엔 사진이 한 5장 정도 담기고 말 거야. 그 사진을 설명하기 위해서 글을 한 2만 자씩은 써야 할 테니 말이야.
우린 추억하기엔 너무도 생경한 행복이나, 슬픔이나, 즐거움이나, 창피함 같은 감정들을 잘 정리해서 보관하고 있는 중인 거지. 특히 슬픔이나 창피함 같은 감정들이 우리가 겪었던 당시의 감정만큼 강하게 다시 떠오른다면, 하루하루 용량이 너무 부족한 메모리카드가 돼버릴 것 같아. 새로 살아야 하는 하루에도 창피하고, 슬플 일이 가득한데 과거의 일들까지 매일 나를 찾아온다면, 아마 한 30살 즈음엔 난 쥐구멍 속에서 나오지 못할지도 몰라. 40살 즈음엔 어디 땅속에 굴을 팔지도 모르는 일이지.
너에겐 어떤 추억이 있는지 궁금하다. 너의 사진첩엔 어떤 사진들이 꽂혀 있는지 말이야. 즐거움과 행복만 가득할지, 슬픔과 창피함만 가득할지, 아니면 모든 감정이 다 얼기설기 얽혀있는지 궁금하네. 나는 어떻게 분류하기에도 어려울 만큼 많은 감정들이 잔뜩이야. 이런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된 거라면, 내가 내 생각보다 더 튼튼한 사람이어야 할 것 같은데, 아직 그런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옛날 사진들을 이따금 들춰보는 중이야. 얘는 슬펐고, 얘는 즐거웠었지 하고 말이야. 이렇게 잘 정리해놓고 보면, 좀 완연한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너의 추억엔 늘 많은 행복이 가득하길 바라. 근데 너의 슬픔도 잘 정리해서 어디 꽂아뒀으면 좋겠다. 행복은 좋고, 슬픔은 나쁜 건 아니니까 말이야. 완연한 네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모든 감정들이 너의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만 너의 행복을 겪는 과정은 훨씬 느리고 천천히, 그 행복을 맛까지 다 느끼고 지나갈 수 있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다만 너의 슬픔을 겪는 과정은 그것보단 빠르게, 네가 우울해하지 않을 만큼만 널 괴롭히고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너의 사진첩엔 행복의 향이 가득하길 바라.
완연한 네가 되어가는 길이 마냥 힘들지만은 않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