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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지현 Aug 31. 2023

돈보다 소중한 것

[입금 알림] OO(주) 4,500,000원


매월 말 아침이면 사무실 곳곳에서 알람이 동시에 울린다. 스마트폰 액정에 전 직장 월급보다 2배나 많은 숫자가 찍혀있다. 대기업 사원이 되지 못했다면 과장까지 진급해야 받을 수 있는 액수일 것이다. 이직으로 10년 가까이 시간을 앞당긴 셈이다. 실감 나지 않는 표정으로 연봉 계약서를 붙들고, 꼼지락거렸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간절히 원했던 꿈이 현실로 펼쳐진 기적 같은 날.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회사는 생계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나와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일로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근무환경도 썩 좋지 못했다. 출근길에 굴뚝으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흰 연기가 온몸을 덮쳤다.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고, 귀를 막고 허둥지둥 뛰었다. 연기 속에 어떤 유해물질이 있을지 몰랐다. 기체는 몸속으로 침투하기 쉬운 형태인데 사람마다 감수성이 다르니, 스스로 조심할 수밖에 없다. 특정 공정에만 다녀오면 그날은 하루종일 골을 패는 두통에 시달렸다. 약품 특유의 간장 냄새를 맡고 나면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어느 날엔 동료가 코피를 흘렸다. 산도 높은 화학물질 냄새에 점막이 헐어버린 것이다.


현장에 갈 땐 땀구멍 하나 없는 노란 내산복, 양볼에 필터가 달린 방독마스크, 안전모와 장갑을 착용해야 했다. 한여름에도 마찬가지다. 컴컴하고 밀폐된 공정을 점검하러 가면 중도에 뛰쳐나오기 일쑤였다. 안전보호구로 완전무장한 채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악취와 후텁지근한 공기에 혼미해져 불안감이 엄습하곤 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아무도 못 찾을 것 같은데? 빨리 나가야 해!’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린다. 탈출하자마자 마스크를 다급히 벗어던지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가빠진 호흡과 심장박동이 한참 뒤 잦아들면 그제야 산발된 머리가 신경 쓰인다. 정신이 돌아왔다는 증거다. 폐쇄 공포증인지 공황장애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돈만 있고, 웃음기 없는 회사생활이었다. 1년 동안 행복했던 날이 며칠이냐 묻는다면 12초라고 말할 수 있다. 매달 입금 알림이 뜬 1초만 좋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갈수록 심드렁해졌다. 하지만 새로운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나를 자식처럼 뒷바라지해줄 월세나 생활비, 등록금 같은 자금말이다. 그리고 체력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모를 일이니,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을 만들어 두어야 했다. 결론은 종잣돈이 있어야 하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거대한 눈덩이는 조금만 굴려도 금방 커지니까. 주식에 가만히 넣어두기만 해도 배당금 앞자리가 달라진다. 돈도 중요하지만 내 사업을 키우려면 시간을 최대한 확보할수록 이득이다. 건강한 몸과 젊은 두뇌, 시행착오에 필요한 시간을 모조리 자신에게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연봉은 야심 찬 목표에 박차를 가해주었다. 나는 계획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참고 버텼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코로나19로 반토막 난 주식은 2년째 물려있다. 집도 차도 명품 가방 하나 없는데 월급 200만 원 받던 시절에 비해 절반도 저축하지 못했다. 돈이 다 어디로 샜는지 미스터리다. 그렇다고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지도 않았다. 소소하게 달라지긴 했다. 이를테면 명절 선물세트로 들어온 샴푸 대신 한 통에 5만 원짜리 브랜드 제품을 쓸 수 있게 된 정도? 그래도 고정 수입이 있고, 딸린 식구 하나 없으니, 마음만 먹으면 자산을 빠르게 늘릴 수 있었다. 몸이 고장 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 생각했었다.


일에 대한 회의감의 연속, 갖은 수모를 억지로 참다 보니, 몸과 마음이 고장 나버렸다. 전혀 슬픈 상황이 아닌데도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급기야 양치하다가 마주친 거울 속의 나는 두 눈이 시뻘게진 채로 울고 있었다. 사무실에서도 이유 없는 불안에 휩싸여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곤 했다. 위장도 긴장했는지 막힌 변기처럼 속이 늘 더부룩했다. 생전 처음 피오줌도 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리디스크 진단도 받았다. 차츰 병원에 들어가는 돈과 시간의 비중이 커지자 겁이 났다.


‘건강을 잃으면 모아둔 돈을 병원비로 다 날리게 되는 거 아닐까?’


더 이상 일을 잘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키는 일만 겨우 해내다가 시키는 일조차 버거워졌다. 잦은 실수와 저성과가 바닥까지 추락한 나를 반증했다. 피곤하고, 비관하고, 기운 없는 나날이었다. 전진도 후퇴도 못한 채 고여있는 나를 견딜 수 없었다. 정신이 무너지자 육체도 버티지 못했다. 태어난 이래 최고로 부자인 나였지만 최고로 불행했다. 행복하지 않으면 건강이 달아난다. 건강하지 않으면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 꿈꾸는 삶을 살 수 없다면 돈도 무의미하다. 단지 돈 때문에 회사에 다니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원하는 일을 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돈을 벌어야 했다. 유의미한 고정 수익이 만들어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그런 일이야말로 오래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직장 다니는 목적이 오로지 돈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2가지 더 있다. 첫째는 욕심이다. 목표 금액을 달성해도 멈추기 어렵다. ‘조금만 더’라는 생각으로 자꾸만 목표치를 상향시키기 때문이다. 대리 진급만 하면, 연말 성과급만 받으면, 퇴직금을 좀 더 받으려면, 하는 미련이 끊임없이 생긴다.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은 무한정 연기되는 것이다. 아주 못하게 돼버릴 수도 있다. 늦은 나이에 실패하면 큰일이야, 이제 가정이 있으니 마음대로 살 순 없어, 지금껏 쌓아 올린 경력과 연봉이 아까워,라는 생각이 발목을 붙잡기 때문이다.


둘째는 회의감이다. 돈처럼 수치로 보이는 목표는 성취여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심리가 발동해 동기부여가 잘된다. 그런데 달성해도 막상 별 거 없다. 수 십, 수 억대 자산가가 되지 않는 이상 인생이 확 바뀌진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루고 나면 목표가 사라지니, 행동해야 할 이유도 못 느끼게 된다.


‘왜 이 일을 해야 하지? 억지로 참고 견뎌야 할 이유가 이젠 없는데…’


열심히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급기야 인생에 의심을 품게 된다. 인생은 여전히 미지수이고, 앞으로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깜깜하기 때문이다. 사실 다음 목적지가 있더라도 욕심이 가로막는다. 내 경우, 글 써서 먹고사는 삶을 꿈꿨지만 커리어와 연봉이 아까웠고, 새로운 일이 잘될 거란 보장도 없어 두려웠다. 갈팡질팡. 누가 정답을 알려주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책을 읽고, 유튜브 영상을 보고, 아무리 마음을 다스려봐도 번뇌는 끊이지 않았다.


회피하지 말고, 이제 정말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저축한 돈으로 5년 치 생활비는 충당할 수 있었다. 5년은 사업이 자리 잡는데 목표한 기간인데 무수입이더라도 최소한 밥은 먹고살 수 있는 돈이 있었다. 물론 경제활동을 아예 안 할 생각도 아니고, 배당금을 월세처럼 받으면 더 오랜 기간 버틸 수도 있는 것이다. 연애, 결혼은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감사하게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나타난다 해도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 때 해야 할 것 같다. 감정에 휩쓸려 경솔한 판단을 해버릴 수도 있고, 나도 상대에게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기 싫은 일로 돈 버는 일은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바쳐온 시간과 모은 돈은 이 정도면 족하다고 믿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시간이다. 꿈을 먼저 좇으면 행복과 건강과 돈이 따라올까?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어쩌면 맞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은지도 모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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