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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지현 Aug 30. 2023

대학 강연에 초청된 무경력자

졸업한 대학에서 카톡이 왔다. 졸업한 지 5년 가까이 되었는데 말이다. 궁금했지만 큰 기대 없이 열어본다.


- 학과 설립 30주년을 맞아 교수님, 졸업생, 재학생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기념행사를 준비하였사오니, 참석여부 회신 부탁드립니다.


2가지 사실에 놀란다. 우리 과가 벌써 30주년이나 되었다는 것, 아직 학교에서 내 연락처를 보관하고 있다는 것. 실로 오래간만의 소속감이다. 회사를 나온 지도 5개월째 접어들었다. 갈까, 말까? 메시지 말미에 참석여부를 제출하는 링크가 있다. 클릭. 상단에 초대장이 먼저 보인다. 행사 식순을 주욱 훑어보다 전기에 감전된 듯 충격을 받았다. '졸업생 초청 강연' 문구 때문. 바로 밑에 조그만 글자로 '진출 분야별 1~2명, 총 5명'이라 적혀 있다.


무조건 꽉 잡아야 할 기회 같았다. 본격적인 수익화를 위해 9월부터 무료 강의 이력을 쌓아갈 참이었다. 학교, 도서관, 기업, 공공기관, 군부대 등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초청 강연은 굴러들어 온 찬스였다. 나름 지역 국립대 TOP3에 드는 학교니까 다른 대학 강연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고 말이다. 게다가 새롭게 뛰어든 분야에서 이렇다 할 타이틀이 없어도 비벼볼 수 있었다. 졸업생 특권과 대기업 경력이 있으니까. 물론 나보다 화려한 경력을 가진 선배도 있겠지만 나는 후배들에게 회사밖에서 살아남는 기술을 알려줄 수 있었다. '글쓰기'라는 훌륭한 도구를. 취업 관문을 여는 첫 번째 열쇠도 자소서이잖나.


어떻게 이토록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질까? <내 생각과 관점을 수익화하는 퍼스널 브랜딩>의 저자 조한솔은 말한다. 나만의 노하우나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이를 공유할 만한 자리가 마련된다고. 예를 들어 매일 글을 쓰다가 어느 순간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게 되면 참 신기하게도 관련 강의나 원고 의뢰가 들어온다는 것이다. 운명론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기회는 원래부터 주변에 있었는데 시야가 트여 새롭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는 바이다.


어찌 된 일인지 과사무실에 전화하기까지 꼬박 5일이 걸렸다. 내 안에서 소란한 목소리가 엎치락뒤치락했기 때문. 그것은 완벽주의, 불안, 걱정이었다. 완벽주의가 말했다.


"아직 강연하기엔 부족하지 않나? 스피치 학원부터 가보는 게 어때? 강사라면 떨지 않고, 조리 있게,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말할 수 있어야지."


이어서 불안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있겠어? 주목받는 상황을 극도로 기피하는 너잖아. 10명도 안 되는 북토크에서도 새하얘지는 머리를 붙잡고 간신히 자기소개 세 마디를 해냈는데 괜찮겠어?"


무한굴레 속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중 걱정이 종지부를 찍었다.


"만약 학교 측에서 제안을 거절하면? 다른 기회로 이어질 마중물이 없어지면 더 큰 일이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단 현재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걸 해보기로 했다. 학과 사무실에 전화해 보는 것이다. 이후의 결정은 어차피 내 관할이 아니었다. 나머지는 답변을 듣고 고민해 봐도 늦지 않을 문제였다. 그리고 저지르면 어떻게든 수습하게 되어있다. 서둘러 강의안을 준비하고, 배우처럼 대본을 아예 외워버리면 되니까. 챌린지를 통해 사람은 성장한다. 지난 직장 생활에서 얻은 교훈이다. 긴박한 상황에서 익숙지 않은 일을 하면 스트레스가 크지만 그때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곤 했다. 잠자고 있던 해결사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모든 답은 이미 내 안에 있다. 무사히 마무리하고 난 뒤 탈진하더라도.


생각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언제쯤 전화하면 좋을까? 출근하자마자 오는 전화는 누구든 반가워하지 않으리라. 점심시간도 피해야 한다. 그러나 몇 시부터인지 모른다. 최적의 타이밍은 10시로 보였다.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메모 앱을 켠다. 전할 말을 빼먹는 실수를 할까 봐 간략히 적어본다.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해 안부를 묻는 인사말도 준비한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나의 제안을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유도 필요했다. 김작가 TV 김도윤의 <럭키>에서 배운 설득 법이 떠올랐다. 돈도 빽도 없는 사람이 기회를 얻으려면 '명분'과 '실리'를 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명분은 내가 학생들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한창 진로고민이 많을 후배에게 나는 세상에 다양한 커리어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중견기업, 대기업, 프리랜서로 일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요즘은 평생직장이 없고, 자기 PR 시대인 만큼 회사밖에서 돈 버는 능력이 중요하다. 프리랜서 카피라이터인 나는 일과 삶에 무기가 되는 글쓰기 인사이트를 알려줄 수 있다. 자소서, SNS 콘텐츠 글쓰기에 관해 해 줄 말이 많다. 실리는 행사를 준비하는 담당자의 수고를 어떻게 덜어줄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기한 내 연사 모집이 힘들 수도 있으니, 리스크를 줄여주겠다는 뉘앙스를 풍기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다른 강연자와 나의 차별점을 덧붙이며 쐐기를 박을 생각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두두두. 신호음과 심장소리가 겹쳐 들려온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그러나 대화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미 컨택 중인 후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완벽한 대본은 일순간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어쩔 도리 없이 학교 측에서 솔깃할 만한 말만 골라 서둘러 어필했다. 프리랜서와 글쓰기에 대한 얘기는 쏙 빼놓고, 전공 관련 대기업 경력만 강조했다. 그리고 한 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예정대로 모집이 어려우실까 봐 먼저 제안을 드리는 거라고. 다행스럽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학과장님께 말씀드리면 될 것 같긴 한데 이 번호로 다시 연락드리면 될까요?"


그날 밤까지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학과장님이 바쁘셔서 보고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존에 염두에 둔 사람과 협상이 불발되면 연락할 요량이거나. 꿔다논 보릿자루 마냥. 사실 일정표를 보면 인당 20분 정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구색 맞춰 끼워 넣은 작은 이벤트에 불과한 걸까? 담당자는 큰 그림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회사생활을 돌이켜보면 나도 개별 업체에 신경 쓰지 못했다. 전체를 보기에도 여념이 없었고, 문의 전화에 답변하는 일은 중요도와 긴급도가 상대적으로 낮게 느껴져 미루기 일쑤였다. 을이 돼 보니 새삼 미안해진다. 어쨌거나 나에겐 누구보다 소중한 20분이다.


이런저런 추측이 남발하는 가운데 후회와 반성이 몰려왔다. 망설이지 말고 좀 더 빨리 연락해 볼걸. 어쩌면 기회를 선점할 수도 있잖나. 어차피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고민할 시간에 다른 일에 집중하고 감정 소모를 줄이는 편이 이롭다. 오늘도 스마트폰의 업무 모드를 풀고 기다린다. 정해진 시간에 전화가 오면 자동으로 튕겨내는 기능을 꺼둔 것이다. 식사를 하면서도 혹여 전화를 놓칠세라 귀가 쫑긋하다. 몸은 바삐 움직인다. 누군가 먼저 불러주는 사람이 되도록. 크고 작은 거절에 일희일비하지 않기 위해.


정확히 7일이 지났다. 낙담의 골짜기를 넘어가고, 제안했다는 사실조차 잊혀 갈 때 즈음. 무심코 식탁 위에 있던 토스트를 집어 들고 방으로 향했다. 문턱에서 순간 접시를 떨어트릴 뻔했다. 책상 위 아이패드에 대문짝만 하게 뜬 문구와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전화 수신] 과사무실


설마. 쟁쟁한 강사 후보를 제치고 학과장님께서 나를 간택해 주신 걸까. 충전기에 꽂혀있던 스마트폰을 뽑다가 우당탕탕 떨어트렸다. 파르르 요동치는 성대를 간신히 부여잡고 마른침을 꼴깍. 통화 버튼을 누른다. 들려오는 한마디.


"언니, 안녕하세요! 저 14학번 OO이에요. 미처 몰랐는데 언니 번호더라고요. 빨리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학과장님 답변을 이제야 받아서요. 혹시 강연, 괜찮으실까요?"


오며 가며 인사하던 후배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연결고리가 주는 안도감. 묻고 답하기가 한결 편안해진다. 동생들을 어려워하는 나로서는 언니라는 호칭이 낯설다. 하지만 오늘은 완전히 반대다. 너와 나의 거리감을 대폭 줄여주고, 적극 협조하리라는 의지가 느껴졌기 때문. '언니'는 많이 부르고 듣고 싶은 말이 되었다.


반가움을 뒤로하고 설렘인지 긴장인지 모를 흥분이 따라왔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하면 정말 온 우주가 나를 돕는 걸까. 내가 퇴사한 해에 우리 학과가 30주년을 맞았고, 강의 경력이 딱 필요한 타이밍에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래도 용기 내지 않았다면 날려버렸을 터. 앞으로의 커리어에 박차가 가해지는 기분이었다.


반신반의했던 끌어당김의 법칙이 떠오른다. 바라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면 실제로 이루어질 확률이 높다는 이론. '9월부터 강의를 다니고 수익화를 시작한다.'라고 스스로 믿고 말로 내뱉어왔다. 정확히 9월에 강의료가 지급되는 강연 스케줄이 잡혔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기만 하지는 않았다. 이미 전국구로 돌아다니는 강사가 된 것처럼 한 달간 몰입해 자료를 만들었다.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판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온라인 무료 특강도 기획하고 인원을 모집했다. 이상과 현실의 갭을 줄여나가고자 생각한 대로 행동하게 되었으리라.


후배에게 궁금했던 사항들을 이모저모 물어보았다. 초청 강사 라인업은 삼성 재직자, 대학 교수, 공무원이었다. 장소는 150명 정도 수용되는 계단식 강당. 큰일 났다. 첫 강의치고 규모가 크다. 팔다리가 저릿저릿. 통화를 마무리하고, 고등학교 교사인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려 메시지를 보냈다. 많은 청중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 발표하는 방법은 결국 충분히 연습하고, 예상질문까지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준비한들 떨리지 않는가. 당일의 마인드셋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재차 물었다. 안 물어봤으면 큰 일날 뻔했다.


"이렇게 생각해 봐. 내가 하고 싶은 일 드디어 첫 발이다!"


회사에선 어떻게든 발표를 피하려 숨었던 내가 먼저 손들어 제안하고 준비했다. 번아웃 온 직장인이 자신에게 맞는 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글쓰기라는 무기를 쥐어주고자 시작했다. 드디어 마이크가 주어진 것이다. 내가 대학생 때 누군가 알려줬더라면 이렇게 돌아가진 않았을 터. '과거의 나'와 같은 재학생에게 또 하나의 길을 안내한다 생각하니 발표일이 손꼽아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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