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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지현 Oct 22. 2023

호랑이 새끼

‘나는 군인이다, 나는 군인이다.’


출근길의 주문이다. 본관 자동문이 열리기 직전까지 속으로 중얼중얼 되뇐다.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이다. 나의 타고난 기질은 회사에서 방해가 될 뿐이니까. 이곳은 ‘심사숙고’나 ‘몰입’보다 ‘스피드’, ‘멀티태스킹’이 어울렸다. 등뒤로 문이 닫히는 순간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눈빛은 매서워진다. 방심하면 ‘책임 전가’라는 수류탄과 ‘업무 떠넘기기’ 폭탄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청각도 예민해진다. 내선 전화가 ‘따르릉’ 울리면 이미 늦다. ‘따’하면 팔을 자동반사적으로 뻗는다. 건너편 타 부서 전화까지 놓치지 않고 당겨 받아야 한다. 상사가 부르면 우렁찬 “네!” 대답과 동시에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수 있도록 준비태세를 한다. 자료는 단 번에 찾아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파일철을 잠시라도 기웃거리다간 이내 불호령이 떨어진다.


“아직 멀었나?”


식은땀이 흐르고 뇌정지가 온다. 급기야 아무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면 끝장. 5분 내로 프린터에 성큼성큼 다가간다. 순발력을 짜내 보고할 내용을 떠올리면서.


어떤 질문이건 주어를 뚝 잘라먹으면 이해하는데 버퍼링이 걸린다. 출제자의 의도를 수수께끼 풀듯 요리조리 유추하느라 머릿속은 비상이다. 되물어 볼 수 있지 않느냐고? 상사의 무시와 경멸이 섞인 눈빛을 보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 상사는 묻는 말에 어서 답하라는 듯 온몸으로 재촉한다. 담당자가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건 관심 밖이다. 나는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몰입해 처리하는 편이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다른 사람의 즉각적인 요구에 반응이 느려진다. 그러나 상사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점심시간에도 긴장을 늦추면 굶어 죽을 수 있다. 옛말 틀린 것 없다지만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은 틀렸다.


“대가리가 다 먹었으면 숟가락 놔야지.”


20년 차가 되면 밥을 거의 마신다고 할 정도로 빨리 먹을 수 있게 될까. 속도를 맞춰보려고 허겁지겁 먹다 보니, 소화제도 먹어줘야 했다. 먼저 가서 소중한 점심시간 1분이라도 더 쉬시라 권해봐도 요지부동이다. 눈물겨운 의리다. 아직 반찬이 많이 남은 식판을 아련한 눈빛으로 응시한다. 제일 좋아하는 고구마 맛탕도 그림의 떡. 몸속에 채워진 열량보다 소모하는 에너지가 많아서인지 입사한 지 한 달 만에 5킬로가 빠졌다. 강제 다이어트도 되고 좋지 뭐. 남녀 식사시간은 애초에 디폴트값이 다를지도 모른다. 1년 뒤 여자 후배가 들어오고 나서는 둘이 남게 되었으니 말이다.


몸 담았던 환경 분야는 채용 정원이 보통 한 자리 수다. 기존 담당자가 퇴사하거나, 여러 이유로 관리 대상 시설이 대폭 늘어나면 충원하는 식이다. 내 경우에도 매번 수시 채용이나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첫 회사는 섬유를 만드는 600명 규모 중견기업이었는데 1명이 전공장 환경관리를 전담하는 구조였다. 수질, 대기, 폐기물, 화학물질, 토양을 아우르는 환경 업무를 일괄 도맡았다. 위탁 및 대행업체 관리부터 오염물질 측정, 설비 유지보수, 교육훈련, 정기검사 수검, 관공서 대관, 고객사 Audit 대응 등 넓은 범위를 다뤘다. 그러나 얕게 배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어서 한 분야만 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가 없으니 어딘가 늘 불안했기 때문이다. 또한, 주먹구구식이 아닌 체계를 갖춘 곳에서 차근차근 성장하고 싶었다.


이직한 대기업은 전직장보다 2배 큰 1,300명 규모였고, 화학물질 파트 인원만 5명이나 되었다. 직급도 팀장, 과장, 대리, 주임, 사원으로 고르게 짜여있었다. 모든 것이 딱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나는 공장 한복판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울먹이고 있었다.


“대리님, 저 길 잃은 것 같아요. 어디라고 설명드려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검사 시즌을 앞두고 현장에 뿔뿔이 흩어져 사전 점검을 하던 중 졸지에 미아가 돼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이 똑같은 색과 모양의 설비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공채와 달리 경력직은 현장 투어와 직무 교육이 없었다. 업무를 파악할 시간 없이 곧바로 현업에 투입된다. ‘경력직이니까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기대가 암묵적으로 깔려있다. 해본 일이니까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제조 공정과 설비, 투입 원료와 생성물, 배출 오염물질이 완전히 다르고 히스토리를 파악하는데 장기간 소요되기 때문이다. 답답한 놈이 우물 판다고 과거 자료를 뒤져보고, 담당자를 직접 찾아다니며 손품 발품 다 팔아야 한다. 적어도 수개월은 야근이다. 호랑이는 세상 물정 모르는 제 새끼를 야생에 바로 내던진다. 경력직은 호랑이 새끼와 다름없다.


사실 챙겨주고 싶어도 기존 인원들은 내 코가 석자다. 당장 일을 거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니 인사팀에 경력직 채용을 요청하는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도 신입 채용 및 양성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투입되기 때문에 경력자를 선호한다. 기업이 점점 신규채용을 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다. 스스로 배우고 성장할 줄 알아야 한다. 돌이켜보면 힘든 만큼 빨리 성장하기도 했다. 머리 싸매고 얻은 배움은 문신처럼 평생 각인되었다. 그러나 새로 온 사람들이 매번 괴로워한다는 건 사내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경력직에게 설움과 불안, 무모한 배움, 초과 근무를 오롯이 감당하도록 떠밀고 외면하면 반복해서 이탈자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길게 보면 결국 회사에 손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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