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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지현 Oct 22. 2023

뒤바뀐 인생

중학교 2학년 담임인 정인숙은 영어 교사이기도 했다. 귀에는 여행 가이드가 사용하는 마이크가 꽂혀 있었고, 허리춤에는 스피커가 벨트처럼 채워져 있었다. 교육 열정과 애착을 성대가 감당하지 못해 목이 자주 쉬었던 것이다. 정 선생은 수업 시간을 엄격히 지켰다. 학생이 1초라도 지각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3교시 수업은 매번 지각생이 속출했다. 아이들은 입 속에 무언가를 우물거리며 헐레벌떡 뛰어오기 일쑤였다. 1층 매점에서 파는 후랑크 소시지와 간편 조리식 햄버거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신진대사가 탁월한 중학생에게 점심시간까지 배고픔을 참기란 고문 같아서 차라리 반성문을 쓰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교실까지 전력질주를 하다가 종이 울렸다. 미처 자리에 앉지 못한 예닐곱 명의 학생 속에 나도 끼어있었다. 인숙이 단호하게 말했다.


“늦게 들어온 사람은 맨 뒤에 서서 수업 들으세요. 오늘까지 반성문 제출하고.”


지현은 빈 종이를 무슨 말로 채우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잠깐 빈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뛰어나게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 사실부터 설명하기로 했다. 당시 상황은 어땠고, 무엇을 했으며, 어쩌다 지각을 하게 되었는지 등 자초지종을 써 내려갔다. 마무리를 어떻게 지을까 고민하다가 인숙을 떠올렸다.


‘어떻게 쓰면 선생님 마음이 풀릴까?’


저도 모르게 글쓰기 제1법칙을 정확히 수행한 순간이었다. 독자가 듣고 싶은 말을 쓰려고 한 것이다. 반성문을 하나의 장르로 보고, 글의 목적에도 충실했다. 지현은 내심 독자의 마음을 뒤흔들고 싶었다. 글을 작정하고 썼을 때, 상대방이 의도했던 반응을 보이면 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어쩌면 내면 깊숙이 이런 심산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을 울리고 싶다.’


며칠 뒤 엄마는 학교로 호출되었다. 삼 남매 중 착실한 모범생인 둘째였기에 충격은 두 배로 컸다. 학교폭력만은 아니길 바라며 부리나케 달려갔다. 정 선생은 이것 좀 읽어보시라며 종이를 건넸다. 딸이 쓴 반성문이었다. 간식 사 먹느라 수업에 늦었다는 내용을 읽고 안도하는 와중에 정 선생이 말했다.


“제가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어머님께도 꼭 보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현은 성인이 된 뒤에야 이 에피소드를 듣게 되었다. 엄마 은미는 어렴풋이 드러난 딸의 재능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먹고살기도 팍팍한 형편이어서 뒷바라지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체능은 돈이 많이 드는 분야이고, 예술가는 가난을 면치 못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돼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부모는 자식이 공무원이 되길 바랐다. 실상은 어떤지 몰라도 겉보기에 평생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지현은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었지만 당장 밥벌이를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마음 편히 글 쓰기 위한 생업이 별개로 필요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목표 없이 오로지 성적만 바라보며 공부했기에 세상에 얼마큼 다양한 직업이 있는 줄 몰랐다. 부모에게 들어온 바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돈, 시간을 확보하는데 공무원이 딱이었다.


대학 졸업 후, 동네 도서관에 앉아 하루종일 온라인 강의를 듣고, 문제지를 풀기 시작했다. 공시생 시절에 지현은 대체로 혼자였다. 어쩐지 철학가처럼 자주 사색하게 되는 환경이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고독과 사랑에 관한 심리를 주로 곱씹었던 것 같다. 아무 노트에 생각을 기록해 두었는데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책 내용과 종종 겹치곤 했다. 철학의 대중화를 시도해 온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와 스스로를 동일시한 건 아니다. 깊이 공부하면 자신도 무언가 일궈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그마한 가능성의 씨앗을 엿본 것이다. 2년 간 거의 혼자 지내다시피 하며 어머니의 존재와 사랑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을 절감했다. 깨달은 바를 우연히 참가한 전국 독후감 대회에서 풀어썼다가 2위에 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시험은 낙방, 글을 쓰면 상을 탔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이직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소개서 덕분이었다. 1500명 규모 회사에서 지현은 최초의 여직원이었는데 글쓰기로 바늘구멍을 뚫은 것이다. 실제로 합격 후, 면접관이었던 임원이 “너 자기소개서 보고 뽑은 거야.”라고 직접 말해주었다. 지방대, 중소기업 출신이 원하는 기업에 갈 수 있었던 비결은 글이었다. 반성문, 독후감과 마찬가지로 독자를 인사담당자, 실무진, 임원 및 CEO로 나누어 각각 듣고 싶어 할 만한 내용으로 편집한 것이다. 핵심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닌 ‘독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환경 관리자로 일한지 5년 차에 접어들 무렵, 안타깝게도 지현은 여러모로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건강은 무너져 내린 상태였고, 회사 밖에서 무슨 일로 생계를 이어갈지 막막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독서와 글쓰기였다. 최악의 컨디션일 때도 자발적으로 지속해 온 행위기도 했다.


퇴사 후, 블로그에 서평을 쓰고, 인스타그램에 글쓰기 인사이트를 공유하고, 브런치에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4개월 차 즈음, 마침내 수많은 기회와 수익이 발생했다. 도서 협찬, 첨삭 컨설팅 의뢰, 대학 강연, 출간 제의, 유료 콘텐츠 판매 등등. 글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 되기까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15년 정도가 걸렸다. 먹고살기 넉넉해지거나, 집안을 일으키려면 아직 갈길이 멀지만 말이다. 글쓰기는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대기업 사원으로, 크리에이터이자 프리워커로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어린 시절 내면에서 반짝이다 사라져 버리곤 했던 재능의 씨앗이 무사히 발아하고,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도록 지현은 매일 쓴다.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듯 부지런히 쓸 것이다. 이번엔 글쓰기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다 놓을지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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