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영화음악 LP를 모으던 때가 있었다. 당시 내 또래들은 다 그랬다. 팝이나 가요 LP를 애지중지 모았다. 그러고는 누가 머라이어 캐리 1집 음반을 사면 우르르 떼로 몰려가서 레코드가 닳아 헤질 때까지 들었다.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시는 틈을 타서 맥주를 홀짝이기도 했다. 무슨 맛인지 몰랐지만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 아주 그만이었다. 나누었던 대화라고는 고작해야 “우리 학교에 장만옥이랑 똑같이 생긴 애가 전학을 왔는데 엄청 예뻐” 같은 게 전부였다. 우리는 단순했고 세상도 더없이 단순했다. ‘어떻게 하면 쟤를 꼬실 수 있을까’가 고민인 시절이었다. 1991년 무렵의 일이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던 그 해에 나(와 한 살 터울인 내 아우)는 어느 보습학원에 강제로 등록해야 했다. 1학년 때까지 곧잘 나오던 성적이 2학년 때 곤두박질치자 엄마가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이곳은 학원 내에 독서실을 있어서 학원 선생님들의 감독 하에 빡시게 공부를 시키는 걸로 유명했다. 원어민 교사가 있었다는 점, 매년 과학고와 외고에 여러 학생을 진학시켰다는 점도 엄마가 학원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리라. 나도 일단은 대원외고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이렇다 할 반항 한번 못한 채 방과 후에는 학원 수업을 받고 창밖이 깜깜해질 때까지 학원독서실에서 영어교재를 들여다봐야 했다.
거기에 (실명을 밝히기가 뭐하니) K라는 아이가 있었다. 나보다 한 학년 어렸고 선화예중에 다녔다. 고작 한 살 어리다는 이유로 ‘아이’라고 부르는 건 이상하지만 ‘그녀’라고 하는 건 더 이상하니까 그냥 넘어가자. K는 1학년 때부터 그 학원에 다녔다. 단발머리에 손가락이 예뻤고 글로리아 입을 닮았는데 성악을 전공할 거라는 얘기를 누군가에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성악을 공부하고 있다는 건지 장차 성악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노래를 잘 부른다고 들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성악? 그거 하면 나중에 뚱뚱해지는 거 아닌가’ 하는 별 쓸따리 없는 걱정을 했다. 그게 왜 걱정이었냐면, 내가 K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그날따라 학원 독서실에는 감독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흔치 않은 경우라서 모두들 떡볶이를 먹으러 가거나 <스트리트 파이터Ⅱ>를 하러 오락실로 달려갔는데 왜 그랬는지 나와 K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는 <성문종합영어>와 씨름하던 중이었다. 주위는 어두웠고 스탠드에서 필라멘트 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그때까지는 우리 둘만 남아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어울리지 않게 나도 꽤 집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누가 내 어깨를 살짝 건드렸을 때만 해도 놀라지 않았던 내 눈이 커진 건 그게 K라는 걸 알았을 때였다.
“이거 해석 좀….” 내 이름을 부르거나 “저기” 하며 말을 끌지도 않고 불쑥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학원에서 나눠준 숙제인 듯했다. ‘뭐야, 이거 해석 못하면 대망신인데’라는 두려움이 우선 엄습했다.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전년도 외고 기출문제를 모아놓은 프린트에서 봤던 문장이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는 식으로 겨우 설명해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내 영어실력이래 봐야 뻔하니까 그게 제대로 된 해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일을 계기로 나는 K와 친해졌다. <늑대와 춤을>을 보러 극장에 가거나 대여점에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빌려 같이 보기도 했다. 겨울방학이었고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집이 늘 비어 있었으며 우리는 시간이 많았다.
K와 내가 서먹해진 건 발렌타인데이를 지나고 다음 날부터였다. 2월 14일에 나는 K에게 초콜릿을 선물 받았다. 안에 달짝지근한 알코올이 들어 있어서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자랑할 속셈으로 절반 정도를 내 동생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학원에서) K와 같은 반이었던 아우가 다음 날 묘한 얘기를 했다. 어제 자기가 먹은 초콜릿을 2학년 아무개도 들고 다니더라는 거다. 약간의 탐문 끝에 K가 자기와 같은 반의 남자아이에게도 내게 건넨 것과 똑같은 초콜릿을 주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필이면 부잣집 외동아들에 건방지고 생김새도 에드워드 펄롱을 닮은, 내가 늘 밥맛이라고 여기던 놈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화가 났다. 그때 K에게 자초지종을 듣거나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설명했다면 좋았으련만, 그러지 않았다. 이러쿵저러쿵 말도 없이 나는 K를 외면했다. 말을 걸어올라 치면 냉정하게 못 본 척했다. 간혹 그놈과 함께 있는 K의 모습은 (같은 반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인데도) 내 화를 더 부추겼다.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붙어 앉아서 연애나 하고 있다’는 이유로 학원 독서실이 폐쇄된 것은 그 즈음이었다. 독서실 책상 윗 칸에 있는 참고서며 문제집을 전부 집으로 가져가라는 공지가 있던 날, K는 학원을 그만뒀다. 나도 내 짐을 정리하러 독서실에 갔다. 내 책상 위에는 LP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였다. 메모는 없었다.
한국에도 생중계된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다가 나는 문득 K를 떠올렸다. 수상자로 무대에 오른 엔니오 모리꼬네가 눈물을 흘리던 장면에서였다. 재즈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한테 여섯 살 때부터 악보 보는 법을 배우고 11살 때 나이트클럽에 연주하러 다니던 아버지를 대신해 트럼펫을 불었으며 레오네, 폴란스키, 드 팔마, 베르톨루치 같은 거장과 함께 500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의 음악을 만들고 황금사자상, 은휘장상, 아카데미 공로상, 골든글로브상, 황금디스크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을 받은 바 있는 마에스트로가 눈물을 흘렸던 건, 그것이 아카데미상이었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쩐지 그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감독들로부터 거의 독재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완고하고 도가 지나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돈도 많이 드는 사람(『엔니오 모리코네와의 대화』 中)”이라는 식의 소문에 시달렸던 그가, 비로소 그를 오해했던 혹은 그가 오해했던 이들과 화해하며 흘린 회한의 눈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마주했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달짝지근한 술이 든 초콜릿과 내가 K에게 했던 매정한 행동들과 ‘데보라의 테마(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ST)’가 마치 먼 바다로 떠나는 여객선의 뱃고동 소리처럼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지금쯤 K는 바라던 대로 성악가가 됐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녀도 멋진 무대에 올라 무게감 있는 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멀리서나마 내가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잠깐 생각해 봤는데, 부질없고 그저 미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