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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머리앤 Apr 04. 2024

그럴 수도 있지

- 내 수경, 수모 어디 갔니?!

"여보, 수영 재밌지?"

"에휴, 뭐 한 게 있어야 재밌지. 음파가 다야."


일주일에 고작 2번 가는 수영 강습을

딱 네 번가고 

옴팡 감기에 걸렸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한 이주 가까이 음파만 한 것 같아요.

두 번 정도는 초보반 레일 구석에서 호흡 연습을 했고,

두 번 정도는 유아풀에서 수평으로 몸만 띄워서 음파를 했으니까요. 

(수영복 입은 채로 움직임이 전혀 없으니 

감기 걸리기 딱 좋았던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저 혼자 초보라 약간 방치된 것 같아요. 

그때는 수모를 쓰면서도 쓰지 말까 생각도 했습니다.

딱히 입수할 일이 없으니 수모가 젖을 일이 없으니까요 ㅎㅎ


'아, 수영 괜히 등록했나......'


감기에 걸려서 이주를 쉬니깐 더 가기 싫더라고요.

그렇지만 이번에도 수영을 포기하면 진짜 제 인생에 수영은 다시 없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힘을 내서 수영장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새벽에 주섬주섬 수영용품을 챙겼습니다.


오 마이 갓.

수모랑 수경이 없는 거예요.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수영장에 놓고 왔는데 그동안 아파서 못 갔으니

놓고 온지도 몰랐던 거죠.

원래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건데 잃어버리니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수영장에 도착했습니다.

신발을 사물함에 넣자마자 가방을 멘 채로 

청소해 주시는 이모님께 여쭤봤어요.

얼른 여쭤보고 싶은 마음에 마음이 급했거든요.


"선생님, 혹시 수모랑 수경 분실물 나온 거 있을까요?"

"분실물 모아놓은 곳 여기니깐 한 번 봐봐. 다들 잘 찾아가지를 않아."

"선생님, 제 것은 새거라 보시면 눈에 띄실 텐데..."

"다른 사람도 잃어버리고 나서, 다 자기 건 새 거라고 하던데?"

"전 진짜로 산지 이주도 안된 거예요.ㅠㅠㅠ"


결국 못 찾았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이모님께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수모와 수경을 가져가라고 하셔서

흠집이 잔뜩 난 오래된 수경과 머리에 잘 맞지도 않는 아동 수모를 얻었습니다. 

그거라도 있어야 수영을 하니까요.


아뿔싸.

탈의를 하러 사물함에 다시 가려고 보니

제 신발을 몇 번 칸에 넣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열쇠라도 뺐어야 하는데

신발만 넣고 닫아버린 거예요.

마침 말일 즈음이라 6시 수영반 회원분들도 몇 분 안 오셨는지 잠겨 있는 사물함이 많지 않았습니다.

'대충 어디에 넣었는지도 왜 기억이 안나는 거야.'


"제가 왜 이러는 걸까요. 신발을 못 찾겠네요."

"그런 날도 있지 뭐. 그럴 수도 있지."


결국, 수십 개의 사물함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간신히 신발을 넣은 사물함을 찾았습니다. 

오랜만에 수영하러 와서 

긴장도 많이 되는데

하기도 전에 진을 다 뺐더니 

샤워만 하고 다시 집에 가고 싶어 졌습니다.


용기를 내서 수영장에 들어갔습니다.

오랜만에 발차기를 하는데 딱 죽겠다 싶은 거예요.

너무 좌절스러운 건 앞으로 나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점점 가라앉는 느낌이었습니다.

뒷사람은 저보다 빠르니 마음은 너무 급하고...


"회원님, 오늘 아침 안 먹었어요? 발차기가 너무 힘이 없어요."


대학생 여름 방학 시절에 수영을 배운 적이 있거든요.

수영강습반에서 제가 제일 젊었던 것 같은데

수영선생님께서 제 발차기만 보시면 저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 약한 발차기마저 하고 오는 날이면

정말 오전 내내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네, 저는 20대에도 체력이 약했었나 봅니다. 


맞아요.

20대에도 약했던 발차기가 

그때보다 몸무게가 조금 늘어난 아줌마가 되었다고 엄청 강해지진 않았을 거잖아요.


발차기를 하고 나오면서 다리가 후덜 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수영을 마치고

출근하는 길에

수경과 수모를 잃어버리고

신발도 힘들게 찾은 생각이 자꾸 나서

자책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이모님 말씀이 귓가에 맴돌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지.'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 말이 하루 종일 마음속에 자리 잡아 지친 저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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