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보, 고마워
"뭐야?"
너무 놀라서 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버렸어요.
딱 지하철 한 정거장 차이거든요.
저희 집에서 수영장까지요.
3분이라는 시간 차이의 마법인 건지, 동네의 차이인 건지..
지하철 한 정거장 차이라 해도
저희 집과 수영장 사이엔 천(川)이 있어서 옆동네라 하기엔 좀 멀거든요.
지하철 역에 들어갈 때만 해도 보슬비였던 것 같은데
지하철 역을 빠져나오려고 봤더니
앞이 거의 보이지가 않을 정도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어요.
이 비를 뚫고 수영장까지 걸어가면 분명 다 젖을 테고
그렇다고 의자도 없는 지하철 역에 계속 서있기도 뭐 하고
다시 돌아가자니 어차피 폭우일 테고.
장대비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일단 수영장에 가기로 합니다.
다행히 아주 작은 휴대용 우산이 있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우산도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감사한 건,
정수리에는 비를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 느낌 아시죠.
운동화에 물이 막 차오르는 느낌.
몇 걸음 걷다 보니
빗물이 운동화로 들어가고 있는 건지
운동화가 물을 내뿜고 있는 건지
아니면
빗물과 운동화가 서로 물주머니를 주고받는 건지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절. 퍼. 덕 절. 퍼. 덕.
정신없이 걷다 보니 수영장이에요.
우산을 접고 제 모습을 보는데
옷 입은 채로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모습입니다.
일단 수영복을 갈아입고 수영장에 들어갔습니다.
워매~
사람들이 그득해요.
'이 분들은 폭우에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정말 신기했습니다.
저는 지하철을 타고 온 거라
되돌아가도 어차피 폭우 상태일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수영하러 온 거잖아요.
수영 강사님께서 저에게 여쭤보시더군요.
"빗소리가 엄청 크게 들리던데 밖에 비 많이 와요?"
"엄청 많이 와요. 옷이 다 젖었어요. "
"차 타고 오는 거 아니에요?"
"네, 저는 지하철 첫 차 타고 옵니다."
"옷이 다 젖었는데 이따가 어떻게 출근하려고요?"
"뭐..... 남편을 불러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남편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원래 남편에게 부탁을 잘 안 하거든요.
좀 독립적인 편이기도 하고 남편이 원체 바쁘니까요.
무엇보다 상대에게 기대가 별로 없어야
결혼 생활이 잘 유지된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거든요.
정말 희한하게도
수영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보니 비가 한 방울도 안 오더군요.
남편에게 전화를 했어요.
"여보, 나 옷 좀 가져다 줄래? 옷이 다 젖어서 출근할 수가 없어."
잠결에 전화를 받은 남편은
뭐라 뭐라 횡설수설하더니 알겠다고 하더군요.
"무슨 옷을 챙겨가야 해?"
라고 묻길래 그냥 아무거나 보이는 거 가져오라고 했어요.
남편은 진짜,
진짜 아무거나 가져왔더라고요.
가져온 것만으로도 참 고마웠어요.
역시 결혼생활은 상대에게 별로 기대가 없어야 행복합니다.
남편 덕분에 폭우가 내린 날에도
출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