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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글 Nov 07. 2023

다시 시작하는 마음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가을을 정의한다면.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도로가 축축했다. 인도 곳곳엔 가로수의 낙엽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기온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을은 깊고 선명해졌다. 지난 여행의 여독이 풀리지 않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사이 대회 장소에 도착하였다. 커다란 강당에 들어서자 하얀 도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설렘과 긴장이 함께 물들어 있었고 아이들과 동행한 보호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이들을 응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아이의 태권도 대회가 있는 날, 11살 인생 중 가장 큰 대회다. 대회를 준비하는 내내 자신감 넘쳤던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나도 내심 좋은 결과를 기대를 했던 건 사실이다.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덩달아 긴장이 되기 시작하였다.     


 아이가 출전하는 종목은 두 가지다. 오전엔 격파, 그리고 오후엔 품새(공격과 방어의 기본 기술을 연결한 동작)였다. 격파는 말 그대로 3인 1조로 가장 많은 나무 송판을 깨뜨리는 아이가 승리하는 경기였다. 주로 품새 연습을 했던 아이는 그동안 진짜 나무 송판이 아닌 연습용 송판만 경험해 봤다고 했다. 첫 경기의 결과는 아이에게 큰 패배감을 안겨줬다. 같은 조 내에서 최하위 성적을 기록한 것. 단 두 장의 송판만 깨뜨린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사색이 되어 자리로 돌아왔다. ‘엄마, 이건 정말 실수였어.’ 코끝이 벌게지도록 눈물을 참던 아이는 사범님들이 번갈아 찾아오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가 빨리 슬픔을 떨쳤으면 하는 마음에 옆에 있던 나도 말이 주절주절 길어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눈짓으로 나에게 이야기를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이 스스로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시간을 주라는 뜻이었을 터, 나는 말을 거두고 가만히 옆에 앉아 아이가 헤어 나오길 기다렸다.

      

 점심 식사 후 진행된 오후 경기는 엄마인 나도 기대했던 종목이었다. 첫 대회 출전을 앞두고 관장님께서도 아이를 떠오르는 별(앗, 정말 도치 엄마스럽다!)이라고 칭했을 정도였으니 이번 경기만큼은 아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길 바랐다. 경기는 토너먼트식으로 진행되었고 첫 경기부터 3:0의 완벽한 결과를 수월하게 얻었다. 다음 경기도 무사히 흘러 그토록 원했던 금메달을 목에 걸자 아이의 얼굴이 금세 금빛으로 일렁였다. 아이들의 웃음과 눈물이 교차했던 태권도 대회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짜릿한 성취감을 느낀 아이는 오늘까지도 기분이 좋다.

 올해 4학년, 1학기까진 저학년의 어린 티를 벗지 못하는 것 같던 아이는 2학기가 되자 부쩍 달라졌다. 제법 진지하게 친구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에서 아이의 성장을 느끼곤 했는데, 그건 아이가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엄마, OO, OO, OO가 셋이서만 하는 놀이라고 나랑은 놀지도 않아.’ (불과 며칠 전까지도 우리 집을 오갔던 친구의 이야기다.) ‘엄마, OO는 웃고 있다가도 내가 이름만 부르면 갑자기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봐.’ (피아노 수업이 끝나면 학원 선생님께서 퇴근하실 때까지 놀다 오는 사이다..) 하며 아이는 내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심각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엄마인 내 입장에선 심장이 ‘쿵’ 떨어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아이의 학교 생활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담임 선생님께라도 여쭤봐야 하나? 하지만 최근 교권 관련 여러 사건들로 인해 담임 선생님과 긴밀하게 아이에 대해 소통하는 일은 부담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너도 종종 두 세 친구와만 만화책을 만들곤 했으니 그 친구들도 셋이서만 해야 하는 놀이가 있을 수 있어. 다음 놀이는 함께 하자고 얘기해 봐.’ 혹은 ‘아마 갑자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니 놀라서 표정이 굳은 건 아닐까?’ 하며 머릿속으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만 아이 앞에선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을 했다. 그러면 아이는 음? 그런가? 하며 바로 다른 대화로 넘어갔다.     


 나와의 대화가 끝나면 아이는 곧바로 자신의 세계로 들어가곤 한다. 예체능 학원만 다니는 아이는 5시 30분 정도면 보통 일과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제집이라도 한 장이라도 풀면 좋으련만 저녁 먹고 쉬는 시간을 제외하곤 내내 그림만 그린다. 내 딴엔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스케치 학원 같은 곳에서 전문 강사에게 배우는 것을 권하지만 그럴 때 아이는 단번에 내 제안을 거절한다. 혼자 더 해보고 싶다며 서점에서 미술 관련 책 한 권을 더 사달라고 한다. 그러곤 다시 몸을 웅크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이는 내 생각보다 단단했다. 사소한 일에도 크게 동요하는 내가 아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면 밤새 고민을 한다거나 어떻게든 친구들의 장단을 맞춰줄 생각부터 했을 텐데(실제로 학창 시절의 난 그랬다.) 아이는 그럴 때일수록 본인의 일에 몰두했다. 그러는 사이 낙엽 떨어지듯 사사로운 사건들은 자연스레 해결이 되었고 모든 걸 털어내자 진해진 나무의 수형처럼 아이 본연의 모습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아이는 스스로를 매몰시키는 감정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묵묵하게 해낼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세계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기특했다. 한편으론 다행인 일이었고, 또 한편으론 부러운 일이었다.

     

 가을이 깊어간다. 너무나 흔한 문장이지만 이 말만큼 가을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나에겐 없는 것 같다. 나무들은 점점 제 색을 내기 시작했고 할 일을 마친 나뭇잎들을 홀가분하게 털어냈다. 오늘은 강풍과 함께 큰 비가 내린다. 날이 밝아오면 아마 언제 더웠냐는 듯 옷깃을 여미는 진짜 가을이 올 것이다.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시작하는 ‘진짜 가을’의 시작.

      

 가을 내내 나를 관통했던 고민은 보이지 않는 벽을 뚫고 나갈 ‘나만의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1년만 더 해보자와 이제 그만두자는 마음이 번갈아 찾아왔다. 보통의 난 이럴 때 난 끈을 놓는다. 뒷걸음칠 궁리만 한다. 실제로 가을 내내 그렇게 살기도 했고. 하지만 이젠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내가 아이의 등을 바라보듯, 내 등을 바라보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쩌면 이 가을이 다시 시작하기 좋은 계절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졌다.



#이 글은 제가 참여하고 있는 미루글방, 가을 5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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