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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글 Aug 23. 2022

여름은 나에게 오래 남아

끝나가는 여름이 나에게 남긴 것.

  

 ‘어머님, 잠시 통화 가능하세요?’ 아이의 담임선생님께 메시지가 왔다. 선생님께서 먼저 연락을 하실 땐, 좋은 일인 경우는 거의 없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전화벨이 울렸다. 선생님께서는 아이의 학교 생활 중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셨다. 며칠 후 아이의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담임 선생님의 방학 인사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방학 동안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도록 가정에서도 신경 쓰겠습니다.’ 제일 마지막에 쓴 문장이었다. 아이는 올해 초 성조숙증 진단을 받고 한 달에 한 번씩 호르몬 억제 주사를 맞고 있다. 이른 몸의 성장을 따라 마음도 빠르게 움직인 걸까? 천천히 와도 되었을 법한 사춘기 기미가 벌써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몇 가지 일들을 앞에 두고 늘 갈등이 생겼다. 우리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사랑인지 전쟁인지 모를 날들을 무성하게 채워 나갔다.      


 남편은 여름 내내 긴 장마처럼 무겁고 어두웠다. 좀처럼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아이들도 눈치를 챌 만큼 감정을 쉽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루의 대화 중 절반 이상은 업무 스트레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학 졸업반 때부터 한 직장에서만 12년 넘게 근무를 했다. 이제 다른 일을 다시 찾기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남편의 회사는 시외삼촌 부부가 대표로 있는 가족 회사다. 이직이라는 단어를 꺼내기 또한 애매한 관계다. 돈 버는 기계가 된 것 같다고 넌지시 말을 꺼낼 때마다, 우리 집엔 돈이 기계처럼 들어온 적이 없다며 장난으로 답을 하곤 했는데 이젠 이런 말을 꺼낼 수 없을 만큼 힘들어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우리에겐 물만 먹고도 쑥쑥 자라는 콩나물 같은 아이가 둘이나 있고 나는 경력 단절이 된 지 10년이 넘었다. 언제든 그만두고 쉬라고 하고 싶지만 당장은 시원한 휴식을 권할 처지가 못된다. 꿈속에서도 남편은 힘들어했다. 늦은 밤, 막차가 끊겨 도와 달라고 전화를 한 나에게 그는 갑자기 시간을 달라고 했다. 너무 힘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다고, 너의 문제는 도와줄 수 없겠다고, 힘들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입만 뻐끔거리다 잠에서 깼다. 남편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새벽까지 내린 비 때문에 벽을 타고 들어온 축축한 습기가 내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지난 일요일 아침, 잠이 채 깨기도 전에 어디선가 진동이 울렸다. 반쯤 감은 눈을 하고 더듬더듬 손으로 핸드폰을 찾아 들어 올렸다. ‘언니, 저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빈소 준비하고 있어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남편에게 친한 동생의 부고 소식을 전하는 내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그날은 남편의 당직 날이었다. 당직 근무가 끝나는 대로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빈소로 가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늘 마음이 쓰이는 동생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장례식장에 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종일 퇴근 시간만 기다리다 서둘러 길을 나섰다. 나보다 5살 어린 이 동생은 삼 남매 중 맏이였다. 갓 군대에서 제대한 여전히 어린 티가 잔뜩 묻은 25살의 막내 남동생이 상주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언니, 저도 참고 있어요. 절대 울지 마세요.’ 마스크 위로 이미 물기가 가득한 나의 눈을 보자 동생은 울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국화꽃을 들고 고인께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나란히 서 있는 젊은 삼 남매와 마주 보며 위로의 인사를 나눴다. 여름 내내 가장 많이 만났던 책 속 이야기는 상실, 애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글을 읽는 내내 나름의 상상으로 나만의 대처법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현실에서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몇 시간 동안 테이블 한쪽에서 자리를 지키다 다시 집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버스 정류장이 바로 앞에 있었지만 걸어가고 싶었다. 깊은 밤이었지만 1시간 30분여를 터벅터벅 걸었다. 예전처럼 살 끝에 스치는 바람이 끈적이지 않았다.      


 길게만 느껴졌던 여름도 이제 끝이 보이는 듯하다. 뒤 돌아보면 나의 여름은 뜨겁다고 하기엔 미지근했고, 시원하다고 하기엔 축축했고, 아무렇지 않다고 하기엔 버거웠다. 여름이 주는 기쁨보다는 슬픔의 무게가 컸나 보다. 

 

 슬픔이 묵직한 날엔 어떻게든 걸으러 나가야 마음이 가벼워졌다. 땅 위에 발을 툭툭 내딛는 몸짓은 나의 시름을 덜어주는 것 같았다. 뚝뚝 흐르는 땀을 눈물이라고 생각하면 후련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여름은 밤에 걷기 좋은 계절이었다. 남편의 늦은 퇴근 시간에 개의치 않고 산책길에 나설 수 있어 좋은 날들도 많았다. 아이들의 방학엔 산책만이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집을 나서 성곽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 그동안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며 쉬곤 했다. 코앞의 성벽부터 멀리 주택가, 더 멀리 빽빽한 아파트들이 저마다의 불빛을 은은하게 내뿜고 있다. 나는 야경을 좋아한다. 어둠은 모든 것을 덮어준다. 반짝이는 것만 남은 풍경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기쁨만 남는 여름이라면 좋았을까? 여름은 나에겐 슬픔만 남긴 건가. 여름 방학을 보낸 두 아이는 제 몫을 다해 건강하게 자랐다. 평생의 추억이 될 잊지 못할 가족 여행도 다녀왔다. 아이와 남편의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여러 관계들 사이에서 생긴 일들로 잔뜩 웅크린 날들도 많았지만 걷기 덕분에 슬픔의 순간도 잠시 덮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늘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던 여름이었다. 모든 일은 자연스레 생겼다가 사라졌다.     

 

 냉동고에 얼음을 채우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낮의 햇빛은 여전히 뜨겁지만 언뜻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청량해졌다. 길을 걷다 만나는 은행나무의 나뭇잎이 진한 초록에서 노란빛을 머금은 연두로 점점 옅어지고 있다. 에어컨을 틀고 잠에 빠졌다가도 한기에 눈을 떠 에어컨을 끄고 약한 선풍기 바람에 의지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얇은 이불로 아이들의 배를 가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렇게 시들어 가는듯한 이 여름도 여름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이렇게 또 한 계절을 살아냈음에 안도감을 느낀다. 8월 23일인 오늘은 아이의 개학식, 그리고 처서다. 가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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