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백석, 정지용, 김소월… 시집을 펼쳐 목차를 살폈다. 익숙한 시인들의 이름이 보인다. 큰 다짐이라도 한 듯 심호흡을 크게 하고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어디선가 본 듯한 시도 있고, 절로 노래가 떠오르는 시도 있었다.
주입식 교육의 역효과는 성인이 되어 나타났다. 시험을 위해서만 시를 접했던 나는 시를 만나면 갑자기 비장해졌다. 시대적 배경을 상상하게 되고, 혹시 나라를 잃었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건 아닌지, 하다못해 농사짓던 쌀이라도 뺏겼을까 노심초사하며 고민을 시작했다. 제목은 왜 이렇게 지었을까, 이 단어는 왜 여기 있을까, 연과 행은 왜 이렇게 나눴을까, 조사 하나에도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며 읽던 학창 시절이 떠올라 어떤 시도 편하게 읽지 못했다. 정답을 찾을 필요가 없음에도 여전히 시는 어려웠다.
다시 책을 읽고 독서 모임을 시작하면서 시를 읽을 기회가 종종 생겼다. 하지만 그 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 시와 친해질 거야!’라는 말은 그저 다짐에 불과했다. 어쩐지 짧은 시보다는 긴 글이 편했다. 시를 통해 시인의 마음을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쉽게, 자세히 읽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글은 상대방을 그리고 나 자신을 읽는 방법 중 하나였다.
해는 뜨겁지만 바람 끝은 제법 차가워졌다. 새벽이 되면 나는 자연스레 이불을 돌돌 말았다. 내 옆의 아이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걷는 길마다 가을꽃들이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렸다. 가을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방 가득 책을 넣고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나가서는 할 일은 시작도 못 한 채 멍하니 풍경만 바라보다 돌아오기 일쑤였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동동 떠다녔다. 사계절 중 가을을 가장 좋아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나는 자꾸 발걸음을 멈칫하게 되었다.
사실은 시보다 사는 게 어렵다. 열심히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닌데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몸과 마음은 소진되어 가는데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잡히는 게 없다. 말을 하는 법도, 글을 읽고 쓰는 법도 다 잊은 사람처럼 늘 해오던 일이 버겁기만 하다. 나를 위해 쓰기 시작한 글 덕분에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갑자기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써야 할 이유와 쓰지 않아야 할 이유 중 어느 것도 찾지 못하니 한숨과 조급함만 늘어간다. 긴 생각이 나를 점점 갉아먹고 있었다.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가을, 저녁달 고양이>
다시 시를 읽게 되었다. 가을 글방이 시와 함께 시작하게 된 건 오히려 다행인 일이었다. 이제는 시를 읽으며 애써 해석할 필요가 없다. 손 닿을 때마다 한 편씩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몇 편을 내리읽기도 하고 그림만 보기도 했다. 예쁜 메모지를 찾아 필사를 하는 시간 또한 시가 준 하나의 위안이었다. 굳이 애쓰지 않는 순간이 필요한 때도 있다는 걸 시를 읽으며 알게 된 것 같다. 나는 늘애쓰는 사람이었다. 혼자 앓던 마음속 체기가 쌓여, 모든 일상과 관계가 얹히는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 건 결국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는 것처럼 내 마음 같지 않은 일들을 굳이 이해하려 애쓰지 않는 건 어떨까, 모른 척 내려놓는 연습도 필요한 때가 있는 건 아닐까.
식탁을 등진 벽에 붙여 놓은 작은 그림이 자꾸만 떨어진다. 그냥 떼어버리면 될 것을 수시로 테이프를 바꿔가며 네 귀퉁이를 부지런히 문지른다. 그러나 그림은 어느새 속절없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져 있었다. 그림 하나 안 붙이면 어떠냐 싶으면서도 그 작은 그림 하나가 그렇게 미련이 남는다. 나는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한 사람이다. 시를 편하게 읽는 연습, 버리는 연습, 그리고 애쓰지 않는 연습까지.